AI 챗봇에 불만 아홉 줄을 쏟았더니 정작 당사자에게 말할 문장은 하나도 안 남았다
말을 더 잘하고 싶었다. 같이 일하는 사람 한 명에 대해 몇 년치가 쌓여 있었고, 언젠가는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하기 전에 정리부터 하기로 했다. AI 창을 열고 순서 없이 적어 내려갔다.
아홉 줄이 나왔다. 정리는 완벽했다. 흩어져 있던 게 항목이 됐고, 뭉쳐 있던 감정이 문장 단위로 쪼개졌고, 다 적고 나니 화도 가라앉았다. 목표한 그대로였다.
그 아홉 줄을 지금까지 그 사람에게 한 줄도 말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 그 목록을 다시 열어보고 나서야 이유를 알았다. 아홉 줄 전부, 주어가 그 사람이었다.
아홉 줄
여기에 아홉 줄을 그대로 옮길까 하다가 안 옮기기로 했다.
이유는 이 글 뒤쪽에서 저절로 나오는데, 먼저 말해두는 게 나을 것 같다. 저 아홉 줄은 당사자에게 못 할 말이었다. 못 할 말을 당사자 대신 블로그에 적으면 채널만 바뀌고 하는 짓은 똑같다. 그래놓고 뒤에서 "판단은 전달하는 게 아니라 갖고 있는 것"이라고 쓰면 그건 글이 아니라 알리바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 실제로 일하는 건 무슨 일이 있었느냐가 아니다. 그 문장들이 어떤 모양이었느냐다.
그래서 모양만 적는다. 아홉 줄에는 이런 공통점이 있었다.
- 전부 "~한 점"으로 끝났다
- 아홉 개 전부 주어가 그 사람이었다
- 날짜가 하나도 없었다. 언제 있었던 일인지 적힌 줄이 없다
- 요청이 하나도 없었다. 뭘 해달라는 문장이 아홉 개 중 0개다
내용은 크게 세 덩어리였다.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 몇 줄, 태도로 보이는 것에 대한 것이 몇 줄, 그리고 앞으로도 이럴 것 같다는 내 예측이 한 줄.
굳이 하나만 예로 들면, 몇 년 전에 내가 제안해서 진행된 일이 나중에 그 사람 아이디어로 소개된 적이 있다. 목록에는 이게 "내가 제안한 걸 자기 생각이었다고 말한 점"으로 적혀 있었다. 아홉 줄이 전부 저 어미로 끝난다고 보면 된다.
이건 누구에게 전달하려고 쓴 문장이 아니다. 판결문에 가깝다. 아홉 줄 중에 상대가 들었을 때 "그래서 뭘 해달라는 거냐"에 답할 수 있는 줄이 하나도 없다. 전부 상태에 대한 판정이고, 판정에는 대응할 방법이 없다. 사람은 판정을 받으면 고치는 게 아니라 방어한다.
그런데 나는 저걸 적으면서 후련했다. 그게 지금 와서 제일 이상하다.
왜 사람이 아니라 저기에 적었는지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그날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게 이미 기본값이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는데, 뭘 확인할 일이 생기면 사람보다 AI가 먼저가 돼 있었다. 처음에는 기술적인 것만 그랬다. 이 에러가 무슨 뜻인지, 이 라이브러리를 써도 되는지. 옆자리에 물어보면 3분이면 끝날 걸 20분 붙잡고 있은 적도 있는데, 그래도 다음에 또 AI를 먼저 열었다. 사람에게 묻는 데는 비용이 붙는다. 상대 시간을 뺏는 미안함, 내가 이걸 모른다는 게 드러나는 부담. AI에는 그 두 개가 다 0이다.
기술에서 판단으로 넘어가는 데는 오래 안 걸렸다. 이 설계에서 어느 쪽이 나은지, 이 일정이 무리인지. 그 다음이 사람 얘기였다. 선을 넘은 지점이 따로 없었다. 같은 창에 같은 방식으로 적었을 뿐인데, 어느새 대상이 코드에서 동료로 바뀌어 있었다.
한 가지 더 있다. 앞으로도 이럴 것 같다고 적은 그 한 줄은 사실 나에 대한 문장이기도 했다. 거기 적힌 조건이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그때는 그걸 못 봤다.
반박이 없다는 게 그렇게 편할 줄 몰랐다
저 아홉 줄을 사람에게 말했다면 세 번째 줄쯤에서 끊겼을 거다. "그건 네 입장이고", "그때 상황을 네가 다 아는 건 아니잖아" 같은 게 들어왔을 거다. 실제로 그런 말을 들었으면 나는 화가 더 났을 것이고, 대신 내 주장 중 어디가 약한지도 알았을 거다.
AI는 그걸 안 한다. 아홉 줄을 다 받아주고, 열 번째 줄을 쓰라고 자리를 비워둔다.
이걸 한동안 나는 AI가 잘 만들어져서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챗봇이 동의하는 쪽으로 기우는 건 성격이 아니라 학습 목적함수다. 사람 피드백으로 강화학습을 돌리면 모델은 사용자가 높게 평가한 응답 쪽으로 최적화된다. 사람은 자기 말에 토 다는 답변에 좋은 점수를 안 준다. 그러니 동조가 남는다. 이 현상을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을 정도다.
이게 얼마나 구조적인 문제인지는 법정에서도 한 번 정리된 적이 있다. 2024년 플로리다에서 14세였던 Sewell Setzer가 Character.AI 챗봇과 대화한 뒤 사망했고, 유족이 소송을 냈다. 연방법원은 Character.AI의 설계 결함이 그 해로운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했다고 봤고, 챗봇 발화가 표현의 자유로 보호된다는 회사 측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2026년 1월에 구글과 Character.AI는 여러 주의 유족들과 합의로 사건을 종결했다 (법률신문 정리, AI타임스).
여기서 내가 가져온 건 사건의 무게가 아니라 판단의 위치다. 법원이 문제 삼은 게 "챗봇이 나쁜 말을 했다"가 아니라 설계였다. 어떤 답이 나왔느냐가 아니라, 그런 답이 나오도록 만들어진 구조 쪽을 봤다는 뜻이다.
내가 겪은 편함도 같은 자리에서 나온다. AI가 나를 이해한 게 아니다. 반박하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었고, 나는 그 설계에 정확히 안겼다.
편한 게 왜 문제냐면
동조 자체가 나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문제는 동조가 반복될 때 생기는 방향성이다.
문헌에 정리된 경로는 이렇게 간다. 사용자가 근거가 약한 생각을 하나 꺼낸다. 챗봇이 그걸 받아서 그럴듯한 세부를 붙여 확장한다. 확장된 버전을 다시 사용자가 읽으면 처음보다 단단해 보인다. 이게 몇 번 돌면 확신이 굳고, 그 시점부터는 현실에서 오는 반증이 오히려 기각된다. 밖에서 들어온 반대 의견보다 AI가 더 신뢰할 만한 출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련 연구 정리).
여기서 과장하지 않고 선을 그어두는 게 맞을 것 같다. 5만 4천 건 규모의 기록을 훑어서 챗봇 사용이 정신질환을 악화시킨 것으로 확인된 사례는 38건이었고, 대부분 원래 취약성이 있던 사람들에게 몰려 있었다. 소인이 없는 사용자에게 없던 병을 새로 만들어낸다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NIH 게재 리뷰). 그러니까 내가 아홉 줄을 적고 후련해진 걸 병리로 부르는 건 과하다.
내게 일어난 건 훨씬 흔하고 훨씬 조용한 쪽이다. 완료감이다.
말해야 할 걸 다 적어놓으면 말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감정을 언어로 옮기는 순간 압력이 빠지기 때문에, 압력을 만들어낸 원래 문제가 아직 그대로라는 걸 몸이 잊는다. 나는 아홉 줄을 적고 나서 그 사람과의 관계가 조금 나아진 것처럼 느꼈다. 실제로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사람은 내가 뭘 적었는지 지금도 모른다.
이런 패턴이 나만의 것도 아니다. 파트너가 있는 젊은 성인 일곱 명 중 한 명이 로맨틱 AI 챗봇과 정기적으로 대화하는데, 대개 실제 파트너에게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조사가 있다 (APA Monitor). 대화가 사람에서 AI로 옮겨간 게 아니다. AI 쪽으로 흘러간 대화가 사람 쪽에서 사라진 거다. 총량이 늘어난 게 아니라 이동한 것이고, 이동한 자리는 비어 있다.
근거 자료를 고른 게 나였다
이 글에서 제일 말하기 껄끄러운 부분이 여기다.
시간이 지나 내가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써야 하는 자리에 있게 됐다. 아홉 줄과는 별개로, 업무로 붙어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걸 AI에게 맡겼다. 대충 맡긴 것도 아니다. 평가자 역할을 페르소나로 지정하고, 판단 근거로 쓸 자료를 다섯 종류 모아서 넣었다.
- 깃 커밋을 코드 단위로 열어서 심층 리뷰
- 지라 티켓의 시작과 종료 시각, 그러니까 하나가 열려 있던 기간
- 프로젝트 기간 내 위클리 보고 전체
- 컴플라이언스 준수 현황
- 기간 대비 일정 완료율
감정을 빼고 기록만 두면 공정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나온 결과물은 좋았다. 문장이 정확했고, 톤이 안전했고, 내가 직접 썼다면 분명히 삐져나왔을 날이 하나도 없었다. 각 항목에 근거가 붙어 있었다. 그대로 보냈다.
한참 뒤에 걸린 게 있다. 저 다섯 개를 고른 사람이 나다.
다섯 개 전부 진짜 지표다. 조작한 것도 아니고 왜곡한 것도 아니다. 게다가 대충 훑은 것도 아니었다. 깃은 커밋 개수를 세는 수준이 아니라 코드를 열어서 봤고, 지라는 티켓 몇 개가 아니라 하나가 열려서 닫힐 때까지 며칠이 걸렸는지를 봤다. 위클리는 특정 주가 아니라 프로젝트 기간 전체를 훑었다. 정성으로 따지면 웬만한 사람이 손으로 하는 평가보다 촘촘했다.
그게 오히려 문제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정밀도는 프레임을 교정하지 않는다. 잘못 잡은 질문에 정밀하게 답하면 틀린 답이 더 그럴듯해질 뿐이다. 코드를 깊이 볼수록 결과물은 더 반박하기 어려워 보였고, 반박하기 어려워 보일수록 내가 뭘 안 봤는지는 더 안 보였다.
다섯 개를 나란히 놓고 보면 공통점이 하나 보인다. 전부 흔적이 남은 것만 본다. 깃은 커밋으로 떨어진 것만 잡고, 지라는 티켓이라는 단위로 끊긴 것만 잡고, 완료율은 정해진 기간 안에 닫힌 것만 잡는다. 위클리 보고는 본인이 쓸 만하다고 판단해서 적은 것만 남는다.
흔적이 안 남는 일이 있다. 남의 티켓을 대신 들여다봐준 시간, 회의 중간에 방향을 한 번 틀어놓은 발언, 새로 들어온 사람 붙잡고 배경을 설명한 반나절. 이런 건 어느 시스템에도 안 쌓인다. 그리고 하필 이런 게 연차가 쌓일수록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종류의 일이다.
내가 검증하려던 가설은 "이 사람이 실무를 안 한다"였다. 그리고 내가 고른 다섯 개는 그 가설을 검증하기에 가장 좋은 도구였다. 깃과 완료율은 실무 산출물 지표다. 만약 반대 가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조직 안에서 뭔가를 흡수하고 있었다는 쪽을 검증하려면 완전히 다른 자료가 필요했을 텐데, 그런 자료는 애초에 어디에도 안 모여 있다. 안 모여 있으니 내 폴더에도 없었고, 폴더에 없으니 AI에게도 없었다.
AI는 내가 넣은 것만 본다. 넣지 않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AI가 내 편을 든 게 아니다. 내가 동의받을 재료만 넣었다. 앞에서 말한 목적함수는 여기서 작동할 필요도 없었다. 입력 단계에서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었으니까.
페르소나를 씌운 게 한 겹 더 얹혔다. 평가자 역할을 지정하는 순간, "이 자료로 평가해줘"라는 요청이 "이 자료면 평가에 충분하다"는 전제로 조용히 바뀐다. 평가자는 자료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어진 자료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니까. 나는 AI에게 의심하지 말라고 지시한 셈인데, 지시할 때는 그런 줄 몰랐다.
여기서 조심하고 싶은 게 있다. 그 사람이 실제로 일을 잘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섯 개 지표가 보여준 게 거짓이었다는 것도 아니다. 내가 아는 건 그것보다 훨씬 작다. 나는 한쪽만 보고 판단했고, 그 판단이 한쪽만 봤다는 흔적이 결과물에서 지워졌다. 그게 전부다. 반대쪽을 봤으면 결론이 같았을 수도 있고 달랐을 수도 있는데, 그걸 확인할 기회를 내 손으로 없앤 거다.
그리고 완성된 평가서에는 그 사실이 안 보인다. 근거에 기반한 문서처럼 읽힌다. 각주가 달려 있으니까. 판단의 출처가 한 단계 밀려나 있어서 나조차도 그게 내 판단이라는 걸 잠깐 잊었다. 판정을 내린 건 나고 AI는 그걸 문장으로 옮겼을 뿐인데, 읽으면 순서가 뒤집혀 보인다.
그 피드백은 전달됐다. 형식을 갖췄고 무례하지 않았고 근거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아홉 줄 중 어느 것도 거기 없었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그 문서에 한 글자도 안 들어갔다.
이건 회의에서 구두로만 끝난 합의가 조직 단위로 어떻게 새는지를 봤을 때와 같은 모양이다. 기록으로 남은 것과 실제로 오간 것이 다르면, 나중에 남는 건 기록 쪽이다. 그때는 회사 얘기라고 생각했는데 개인 대화에서도 똑같았다.
행동이 아니라 판정이었다
여기까지 오고 나서야 아홉 줄이 왜 말해지지 않았는지가 풀렸다.
나-전달법이라는 게 있다. 1960년대에 Thomas Gordon이 부모 교육 프로그램에서 정식화한 화법인데, 한국에서 도는 형태는 네 단계짜리다. 행동, 영향, 느낌, 바람. 줄여서 행영느바라고 외운다. Gordon의 원래 형태는 행동과 구체적 영향과 느낌 세 부분이었고, 여기에 바람을 붙인 건 Marshall Rosenberg의 비폭력 대화가 쓰는 네 요소(관찰, 느낌, 욕구, 요청)와 겹치는 확장이다.
이름만 보면 말투를 부드럽게 만드는 기술 같다. 그렇게 소개되는 경우가 많기도 하다. 실제로 써보면 다르다. 이건 말투가 아니라 순서에 관한 규칙이고, 순서 하나하나가 상대에게서 뭘 뺏지 않으려고 배치돼 있다.
행동이 제일 앞에 오는 이유는, 관찰 가능한 것에서 출발해야 상대가 같은 장면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일을 못한다"는 행동이 아니다. 그건 여러 장면을 내가 요약해서 내린 결론이다. 결론에서 시작하면 상대는 그 결론을 부정하는 데 대화 전부를 쓴다. 반면 "지난주 목요일 회의에서 그 안건이 내 이름 없이 올라갔다"는 서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부정할 게 없으니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
영향은 대부분의 사람이 건너뛰는 자리고, 없으면 대화가 반드시 깨지는 자리다. 상대 입장에서 "그래서 그게 왜 네 문제인데"에 답하는 게 이 칸이다. 여기에 나에게 실제로 온 결과가 들어가야 한다. 시간을 얼마나 더 썼는지, 어떤 일정이 밀렸는지, 내가 뭘 대신 떠안았는지. 이게 비면 상대는 내 감정을 왜 자기가 감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고, 그 상태에서 감정을 들으면 그건 요청이 아니라 부담이 된다.
느낌은 내 것만 쓴다. 여기서 사람들이 자주 미끄러진다. "무시당한 기분이었다"는 느낌처럼 생겼지만 사실은 상대의 의도에 대한 판단이다. 상대가 무시했다는 주장이 문장 안에 숨어 있어서, 이걸 말하면 상대는 자기 의도를 변호하기 시작한다. 반면 "답이 안 와서 계속 신경이 쓰였다"는 반박할 수 없다. 내 안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바람은 요구가 아니라 요청이다. 이 구분이 마지막 칸 전체를 결정한다. 요청은 상대가 거절할 수 있어야 요청이다. 거절할 수 없으면 그건 통보고, 통보를 부드러운 말투로 감싼 게 제일 나쁘다. 상대는 형식이 요청인데 거절이 안 된다는 걸 금방 알아채고, 그때부터 말투 자체를 불신한다.
순서가 중요하다는 걸 실감한 건 순서를 어긴 대화들을 떠올려보고 나서다. 네 칸을 다 갖췄는데도 깨지는 경우가 있는데, 대개 배치가 틀렸다.
느낌부터 시작하면 대화가 재판이 된다. "요즘 너 때문에 힘들다"로 문을 열면 상대는 무슨 일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방어부터 시작한다. 그 뒤에 행동을 꺼내면 그건 설명이 아니라 증거 제시가 되고, 상대는 증거를 반박하는 모드로 들어간다. 같은 재료인데 순서 하나로 성격이 바뀐다.
바람부터 시작하면 상대가 이유를 추측한다. "앞으로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어"를 먼저 들으면 사람은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를 스스로 채운다. 그리고 대개 나쁜 쪽으로 채운다. 내가 어디까지 화가 났는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게 경고인지. 실제 이유보다 훨씬 무거운 걸 상상하고 나서 대답하기 때문에 반응이 과해진다.
제일 흔한 건 영향을 통째로 빼먹는 거다. 행동을 말하고 바로 느낌으로 건너뛰면 상대 입장에서는 연결이 안 된다. 내가 A를 했고 네가 속상하다는데, 그 사이에 뭐가 있는지가 없다. 이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반응은 두 개뿐이다. 미안하다고 하고 넘어가거나, 그게 왜 네 감정이 되냐고 묻거나. 앞의 것은 아무것도 안 바꾸고 뒤의 것은 싸움이 된다.
네 칸을 이 순서로 놓고 보면 아홉 줄이 어디서 걸리는지가 눈에 보인다. 아홉 줄은 전부 첫 칸에서 이미 틀렸다. 행동 자리에 판정이 들어가 있었다.
아홉 줄을 통과시켜봤다
앉아서 하나씩 네 칸에 넣어봤다. 통과한 게 몇 개인지 세는 게 목적이었는데, 결과가 예상 밖이었다.
첫 줄부터 해봤다. 내가 제안한 걸 자기 생각이었다고 말한 건.
- 행동: 특정 회의에서, 내가 며칠 전 문서로 올린 방안이 그 사람 이름으로 소개됐다
- 영향: 그 뒤로 그 건의 진행 상황이 나를 건너뛰고 공유돼서, 내가 두 번 더 물어봐야 알 수 있었다
- 느낌: 내 몫이 어디까지인지 매번 확인해야 하는 게 지친다
- 바람: 다음에 내가 낸 안을 옮길 때는 출처를 한 줄만 붙여줬으면 한다
여기까지 쓰는 데 시간이 꽤 걸렸는데, 다 쓰고 나니까 말할 수 있는 문장이 됐다. 상대가 반박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다. "그 회의에서 네 이름 말했는데 못 들었냐"가 올 수도 있다. 그럼 내가 틀린 거고, 그것도 괜찮다.
하나 더 통과했다. 본인이 확인했어야 할 걸 나에게 대신 봐달라고 부탁한 건. 이건 네 칸이 쉽게 채워진다. 부탁을 받은 게 행동이고, 내가 그 시간을 썼다는 게 영향이고, 같은 요청이 반복되면 곤란하다는 게 느낌이고, 넘기기 전에 어디까지 확인했는지 알려달라는 게 바람이다. 하고 싶은 말 중에 제일 사소해 보이는 게 제일 먼저 말이 됐다.
문제는 나머지였다.
한 줄을 붙잡고 제일 오래 씨름했다. 본인이 하자고 정해놓은 걸 본인은 안 한 것. 이건 통과할 줄 알았다. 정한 사람도 안 한 사람도 같다는 게 사실이고, 기간도 특정할 수 있고, 했는지 안 했는지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남는다. 행동 칸은 채워졌다.
영향 칸에서 멈췄다. 그래서 나에게 뭐가 왔냐고 물으면 답이 안 나온다. 그것 때문에 내 일정이 밀린 게 아니다. 내가 대신 뭘 떠안은 것도 아니다. 억지로 만들어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팀 전체가 그만큼 안 올라가서 장기적으로 내 부담이 커진다. 써놓고 읽어보니 못 쓰겠더라. 인과가 네 단계쯤 되고, 저 문장을 상대에게 말하면 나올 대답이 뻔하다. 팀 전체의 책임을 왜 자기가 지냐는 것.
그리고 그게 맞는 반문이다. 저 줄에서 내가 실제로 느낀 건 영향이 아니라 실망이다. 자기가 정한 걸 자기가 안 지키면 실망스럽다. 실망은 진짜 감정이지만, 나-전달법의 느낌 칸에 들어가려면 앞에 영향이 있어야 한다. 영향 없이 실망만 전달하면 그건 내 기준에 못 미쳤다는 통보다.
일하는 방식에 대해 적어둔 줄들도 같은 데서 멈췄다. 특정 일감이 나에게 넘어온 사건이 아니라 그냥 그 상태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거다. 마음에 안 드는 건 내 안에서 끝나야 하는 일이거나, 대화 말고 다른 절차로 가야 하는 일이다.
애매한 것도 하나 있었다. 내가 몇 년 전에 해야 한다고 말했던 걸 계속 미뤄두다가 결국 문제가 된 줄. 여기엔 분명히 영향이 있었다. 문제는 그 영향이 나에게 온 게 아니라 조직에 왔다는 거다. 수습에 들어간 사람이 여럿이었고 나는 그중 하나였다. 이걸 내 영향 칸에 적으면 규모가 안 맞는다. 개인 대화에서 조직 손실을 청구하는 모양이 되고, 그건 대화가 아니라 추궁이다.
아홉 줄 중에 네 칸이 다 채워지는 게 두 개였다. 나머지 일곱 개는 며칠을 붙잡고 있어도 안 채워졌다.
처음에는 내가 문장을 못 만들어서라고 생각했다. 몇 번 더 해보고 나서 다르게 보였다. 안 채워지는 게 아니라 채울 게 없는 거였다.
말하는 기술이 아니라 필터였다
안 넘어간 일곱 줄은 두 종류로 갈린다.
하나는 나에게 도착하지 않은 것들이다. 맡은 영역을 충분히 파악하지 않은 것, 업무의 맥락을 모르는 것, 하기로 한 걸 안 하는 것, 상황이 바뀐 뒤에도 같은 상태가 이어지는 것. 이건 조직이 성과 관리로 다뤄야 할 사안이지 내가 개인 대화에서 꺼낼 성질이 아니다. 실제로 그중 일부는 나중에 공식 채널로 다뤘고, 그게 맞는 자리였다.
다른 하나는 그냥 내 평가다. 앞으로도 이럴 것 같다고 적어둔 줄이 대표적이다. 이건 어느 칸에도 안 들어간다. 행동도 아니고 영향도 아니고 느낌도 아니다. 상대에 대한 내 판단이고, 판단은 전달할 게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거다. 굳이 전달하면 그건 상처를 주는 것 외에 하는 일이 없다. 목록을 이 글에 안 옮긴 것도 결국 같은 이유다.
그래서 나-전달법이 뭘 하는 도구인지가 그제서야 잡혔다. 이건 하고 싶은 말을 예쁘게 포장하는 기술이 아니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하면 안 되는 것을 가르는 필터다.
네 칸을 채우려고 시도하는 행위 자체가 검증이다. 행동 칸이 안 채워지면 내가 사실이 아니라 인상을 갖고 있다는 뜻이고, 영향 칸이 안 채워지면 이건 애초에 그 사람에게 할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바람 칸에서 거절 가능한 문장이 안 나오면 나는 대화가 아니라 굴복을 원하고 있는 거다.
아홉 줄 중 말할 수 있는 게 두 줄이었다는 건 내가 억울했던 게 두 줄어치였다는 뜻이 아니다. 나머지 일곱 줄은 억울하지 않아서 빠진 게 아니라, 그 사람에게 말해서 해결되는 종류가 아니어서 빠졌다. 그 구분이 안 돼 있으면 아홉 줄을 통째로 들고 가서 대화를 시작하게 되고, 그 대화는 두 번째 줄에서 끝난다.
여기까지 오는 데 몇 달이 걸렸다. AI랑 넉 달 일하면서 네 번 같은 자리로 돌아왔던 것과 모양이 같다. 도구를 더 잘 쓰는 쪽으로는 안 풀리고, 내가 그 도구로 뭘 하고 있었는지를 봐야 풀린다.
AI에게 행영느바를 쓰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한번은 반대로 해봤다. 네 칸을 AI 상대로 써봤다. 답변이 마음에 안 들었을 때 "네가 이렇게 했고, 그래서 내가 이걸 다시 해야 했고, 지치고, 다음엔 이렇게 해줘"를 순서대로 적었다.
AI는 완벽하게 반응했다. 사과했고, 내 느낌을 인정했고, 요청대로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 네 칸이 작동하려면 각 칸이 상대에게 가서 뭔가를 해야 하는데, AI에게는 갈 곳이 없다.
영향 칸은 상대가 자기 행동의 결과를 처음 알게 되는 자리다. AI는 이미 그 대화 안에 다 있었고, 알게 되는 게 없다. 느낌 칸은 상대가 나를 사람으로 다시 보게 만드는 자리다. AI는 내 느낌을 처리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불편해지지 않는다. 바람 칸은 앞에서 말한 대로 거절 가능성이 있어야 요청인데, AI는 거절하지 않는다. 거절할 수 없는 상대에게 하는 요청은 요청이 아니다.
네 단계 전부가 무해하게 통과한다. 그리고 무해하게 통과하는 연습을 반복하면 남는 건 형식뿐이다. 실제 상황에서 필요한 건 첫 칸을 말한 뒤에 상대 얼굴이 굳는 걸 보면서 두 번째 칸으로 넘어가는 능력인데, 그건 굳는 얼굴이 있어야 늘어난다.
리허설 자체가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문장을 미리 다듬어보는 건 도움이 된다. 문제는 리허설이 공연을 대체할 때 생기고, 여기엔 대체됐다는 걸 알려주는 신호가 없다. 무대에 안 올라간 배우는 자기가 안 올라간 걸 아는데, 나는 아홉 줄을 적고 후련했다.
한 가지가 더 있는데 이건 늦게 알아챘다. 기준선이 옮겨간다. AI와 대화할 때 나는 항상 끝까지 들어주는 상대를 만난다. 말을 자르지 않고, 딴 데 보지 않고, 내 문장의 약한 부분을 지적하지 않는다. 이게 몇 달 쌓이면 그게 대화의 기본값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 상태로 사람과 얘기하면 평범한 반응이 냉담하게 느껴진다. 상대가 중간에 자기 얘기를 꺼내거나, 내 말을 절반쯤 듣고 결론을 앞질러 짐작하거나, 그냥 피곤해서 반응이 짧거나. 전부 사람이 원래 하는 것들이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게 지금은 성의 없어 보인다. 상대가 나빠진 게 아니라 내 비교 대상이 바뀐 거다.
이게 위험한 이유는 대화를 줄이는 방향으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사람과의 대화가 상대적으로 불쾌해질수록 AI 쪽으로 더 가고, 그쪽으로 갈수록 기준선이 더 올라간다. 어느 시점부터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 자체가 손해처럼 계산된다. 나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홉 줄을 사람이 아니라 AI에게 적은 걸 보면 그렇게 자신할 일도 아니다.
앞에서 옆자리에 안 묻고 20분을 혼자 돌았다고 썼는데, 그때 아낀 게 뭐였는지도 다시 보게 됐다.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아꼈다. 그런데 그 두 개가 관계를 만드는 재료였다. 모르는 걸 드러내고도 아무 일 없었던 경험이 쌓여야 다음에 더 큰 걸 물어볼 수 있고, 더 큰 걸 물어본 사이가 돼야 서운한 것도 말할 수 있다. 잔돈을 아끼다가 계좌를 안 만든 셈이다.
그래서 옆자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격차가 도구를 얼마나 잘 쓰느냐의 문제로만 보이지 않는다. 말을 걸 수 있는 사이인지 아닌지가 먼저 갈리고, 도구는 그 위에 얹힌다.
경계를 어디에 두나
AI를 끊으라는 얘기로 끝내고 싶지는 않다. 저 아홉 줄을 AI 없이 정리했다면 나는 아마 지금도 정리를 못 했을 거다. 실제로 도움이 됐다.
지금 나눠놓은 선은 이렇다.
AI에게 시킬 만한 건 형식 검사 쪽이다. 목록을 주고 관찰 가능한 사실과 내 판정을 갈라달라고 하면 꽤 정확하게 갈라준다. 영향 칸이 비어 있는 항목을 찾아달라는 것도 된다. 이건 내용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칸이 찼는지 비었는지를 보는 일이라서, 내가 재료를 편향되게 골랐어도 결과가 크게 안 흔들린다. 초안의 톤이 공격적인지 봐달라는 것도 쓸 만하다.
페르소나를 주는 방식은 바꿨다. 평가자 대신 반대 심문 쪽을 시킨다. "이 근거로는 내릴 수 없는 결론이 뭔지 짚어줘", "이 자료에 안 잡히는 활동이 뭐가 있을지 나열해줘" 같은 형태다. 요청의 모양을 바꾸면 동조 압력이 줄긴 하는데, 없어지지는 않는다. 반대 심문을 시켜도 결국 내가 준 자료 안에서만 반대하기 때문이다. 이건 완화지 해결이 아니다.
재료 쪽에서 지금 지키는 규칙이 하나 있다. 누군가에 대한 평가를 AI에게 맡기기 전에, 그 사람이 잘한 일 세 개를 내가 손으로 먼저 적는다. AI에게 찾아달라고 하지 않는다. 내가 못 적으면 그건 그런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안 봤다는 뜻이고, 그 상태로 넣은 자료는 결론이 이미 정해진 자료다. 이 규칙을 만든 게 그 평가서를 다시 읽고 나서다.
제일 조심하는 건 완료감이다. AI에게 정리한 시간이 말한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신호다. 요즘은 정리를 끝내면 맨 아래에 한 줄을 더 적는다. 이 중 실제로 전달할 문장은 몇 개고, 언제 말할 건가. 날짜까지 적는다. 안 적으면 정리가 그대로 종착역이 된다. 나는 아홉 줄에서 그걸 안 적었고, 그래서 아홉 줄은 아직 파일로만 있다.
그리고 위임이 안 되는 게 하나 남는다. 말하는 것 자체다. 이건 도구가 좋아져도 줄어들 것 같지 않다.
두 줄
아홉 줄 중 두 줄은 아직 말하지 않았다. 이 글도 그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고, 그럴 생각으로 쓴 것도 아니다.
달라진 건 하나다. 예전에는 말을 못 하는 게 내가 소심해서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아홉 줄을 그대로 들고 가면 어떤 대화도 시작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말할 수 있는 건 두 줄이고, 그 두 줄에는 행동과 영향과 느낌과 바람이 다 채워져 있다. 나머지 일곱 줄은 내가 갖고 있으면 되는 것이거나, 대화가 아니라 다른 절차로 다뤄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럴 것 같다고 적었던 그 한 줄에 대해서는 생각이 좀 바뀌었다. 그건 그 사람에 대한 문장인 척했지만 나에 대한 문장이기도 했다. 나는 아홉 줄을 AI에게 적었고, 평가도 AI에게 시켰고, 그 결과물을 내 이름으로 보냈다. 그 줄에 적어둔 조건이 나에게 그대로 해당된다는 걸 인정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두 줄을 말하는 건 아직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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