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하던 그 게임들

 


미연시를 만들겠다고 마음먹고 나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만드는 방법을 찾기 전에, 예전에 했던 게임들이 먼저 떠오른 것이다.

장르를 이해하려면 구조를 분석해야 한다. 그건 AI에게 물으면 된다. 그런데 "왜 이 장르가 사람을 끌어당기는가"는 분석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건 기억 속에 있었다.

처음 했던 미연시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고등학생 때였을 거다. 친구 집 컴퓨터에서, 혹은 내 방 책상 위 모니터에서. 제목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게임들이 있다. 지금 검색하면 나올 법한 게임들. 하지만 제목보다는 느낌이 남아 있다.

배경이 학교였던 건 기억난다. 캐릭터들이 교실에 있었고, 점심시간이 있었고, 방과 후가 있었다. 선택지가 나오면 멈춰서 생각했다. 어떤 걸 고르면 이 캐릭터가 좋아할까. 어떤 대화가 이어질까. 몇 번이고 세이브하고 로드하면서 다른 선택을 시도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우스운 일이다. 화면 속 2D 캐릭터의 "호감도"를 올리려고 전전긍긍했다니. 그런데 그때는 진지했다. 정말로 진지했다.

감정은 진짜였다

가짜 관계에서 진짜 감정이 나온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상대는 프로그래밍된 캐릭터고, 대사는 미리 작성된 텍스트고, 선택지도 정해진 분기에 불과하다. 플레이어가 뭘 고르든 결국 작성자가 만든 경로 중 하나를 따라갈 뿐이다.

그런데 감정은 진짜였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느꼈다.

어떤 캐릭터가 웃으면 기분이 좋았다. 슬픈 이야기를 하면 같이 가라앉았다. 다른 캐릭터와 가까워지는 장면이 나오면 묘하게 불편했다. 엔딩에서 이별이 나오면 진짜로 아쉬웠다. 화면을 끄고 나서도 그 감정이 한동안 남아 있었다.

왜 그랬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몇 가지 이유가 보인다.

첫째, 시간을 들였다. 미연시는 빨리 끝나는 게임이 아니다. 몇 시간, 길면 수십 시간을 한 캐릭터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그 시간 동안 캐릭터의 일상을 같이 보고, 대화를 같이 나누고, 갈등을 같이 겪는다. 시간의 축적이 관계처럼 느껴진다.

둘째, 선택했다. 수동적으로 읽기만 한 게 아니라 직접 골랐다. "이 상황에서 나라면 어떻게 할까"를 매번 판단했다. 그 판단이 이야기에 반영되니까, 이야기가 남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 된다.

셋째, 혼자였다. 미연시는 대부분 혼자 하는 게임이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거나 협력하는 구조가 아니다. 화면 속 캐릭터와 나, 둘만의 공간. 이 폐쇄성이 오히려 몰입을 만든다.

기억 속의 장면들

구체적인 스토리는 잊어버렸다. 하지만 장면은 남아 있다. 감정이 붙어 있는 장면.

방과 후 교실에서 둘만 남아 있는 장면. 창밖으로 석양이 들어오고, 대화가 잠깐 멈추는 순간. 그 정적이 왜 그렇게 좋았는지 모르겠다. 아무 말도 안 하는데 뭔가가 있는 것 같은 느낌.

비 오는 날 같이 걸어가는 장면. 우산 하나를 나눠 쓴다든지, 비를 맞으면서 뛰어간다든지. 상투적이다. 뻔하다. 그런데 그때는 뻔하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상황이 만들어내는 물리적 가까움이, 관계의 가까움처럼 느껴졌으니까.

축제 준비를 같이 하는 장면. 함께 뭔가를 만드는 과정. 완성이 목적이 아니라 과정 자체가 관계를 만드는 구조. 나중에 알게 됐지만 이건 꽤 영리한 시나리오 설계였다.

그리고 엔딩. 잘 되는 엔딩보다 잘 안 되는 엔딩이 더 오래 남았다. "여기서 다르게 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게임을 끈 후에도 계속됐다. 후회라는 감정이 가상의 선택에도 적용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 게임들을 한 지 십몇 년이 지났다. 그동안 수많은 게임을 했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미연시에서 느꼈던 감정은 다른 매체의 감정과 결이 달랐다.

영화에서 슬픈 장면을 보면 슬프다. 그런데 그건 관객으로서의 슬픔이다. 캐릭터의 슬픔을 바라보는 슬픔.

소설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읽으면 아프다. 그런데 그건 독자로서의 아픔이다. 이야기가 그렇게 쓰여 있으니까.

미연시에서 나쁜 엔딩을 맞으면 다르다. "내가 다른 걸 골랐으면 이렇게 안 됐을 수도 있는데"라는 생각이 든다. 관객의 슬픔이 아니라 당사자의 후회에 가깝다. 내가 선택했으니까. 그 선택의 결과가 이거니까.

이 차이가 미연시만의 독특한 감정 구조라는 걸, 만들려고 하면서 비로소 명확하게 인식하게 됐다.

돌이켜보면, 2000년대 초반에 게임 라이브러리를 직접 만들던 시절에도 미연시는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기술적으로는 가장 단순한 축에 속하는 게임이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가장 강렬했다. 고작 텍스트와 그림 몇 장인데, 거기서 진짜 감정이 나온다는 게 그때도 신기했다.

아련함의 정체

그때의 감정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아련함"이다. 그리움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고, 향수도 아닌 뭔가. 불명확한 감정이 불명확한 채로 남아 있는 상태.

이게 뭔지 생각해봤다. 아마 미완결 때문일 거다.

미연시의 관계는 늘 미완결이다. 해피엔딩이라도 게임이 끝나면 관계도 끝난다. 배드엔딩이면 관계가 더 완성되지 못한 채 끝난다. 어떤 엔딩이든 "좀 더 있었으면"이라는 감각이 남는다. 이 미완결의 감각이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기억 속에서 아련함으로 숙성되는 거다.

현실의 관계도 비슷할 수 있다. 완벽하게 끝나는 관계는 드물다. 대부분의 관계는 어딘가가 미완결인 채로 멀어지고, 그래서 나중에 문득 떠오른다. 미연시가 만드는 감정이 현실의 관계 감정과 닮아 있다는 건, 그 구조가 의외로 진짜에 가깝다는 뜻일 수 있다.

만드는 사람의 관점

그때는 플레이어였다. 지금은 만드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관점이 완전히 다르다.

플레이어일 때는 그냥 느꼈다. 좋으면 좋은 거고, 슬프면 슬픈 거다. 왜 그런 감정이 드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드는 사람은 "왜"를 알아야 한다. 왜 그 장면에서 감정이 움직였는지. 어떤 요소가 그 감정을 만들었는지. 텍스트인지, 선택지인지, 타이밍인지, 분위기인지. 감정을 분해해서 구조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의도적으로 감정을 설계할 수 있다.

이건 좀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내가 느꼈던 감정을 분석하면, 그 감정의 마법이 깨지는 건 아닐까. 구조를 알면 더 이상 몰입할 수 없는 건 아닐까.

영화 감독이 영화를 볼 때 편집과 카메라 앵글을 의식하듯, 게임을 만드는 사람도 시스템과 분기를 의식하게 될 거다. 그게 감정의 진정성을 훼손하는지, 아니면 더 깊은 이해로 이어지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AI에게 물어봐도 모르는 것

이 편의 내용은 AI에게 물어서 나온 게 아니다. 기억에서 꺼낸 것이다.

AI에게 "미연시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의 종류를 분류해줘"라고 하면 깔끔한 답이 나온다. 설렘, 애착, 슬픔, 후회, 아쉬움, 몰입감. 틀린 말은 없다.

하지만 "방과 후 교실에서 석양이 들어오는 장면이 왜 좋았는지"는 AI가 답할 수 없다. 그건 개인의 경험이고 기억이고 감성이다. 데이터로 환원할 수 없는 영역.

미연시를 만든다는 건, 이 두 가지를 다 다루는 일이다. AI가 줄 수 있는 구조와 분석, 그리고 AI가 줄 수 없는 감성과 경험. 두 가지가 만나야 플레이어의 감정을 움직이는 시나리오가 나온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자연스럽다. 나만 그런 건가, 아니면 이건 보편적인 현상인가. 사람들은 왜 미연시를 할까. 가상의 관계에서 진짜 감정이 나오는 원리는 뭘까. 기억에서 나온 질문을, 이번에는 좀 더 깊이 파보려 한다.


다음 편: 사람들은 왜 미연시를 할까 — 가상 관계에서 진짜 감정이 나오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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