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른 게임들은 감정을 못 끌어내는가

 


미연시에서 감정이 나오는 원리를 분석했다. 그렇다면 반대 질문이 자연스럽다. 다른 게임들은 왜 그걸 못 할까?

물론 "못 한다"는 건 과장이다. 라스트 오브 어스에서 눈물 흘린 사람도 있고, 파이널 판타지에서 가슴이 먹먹해진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대부분 컷신이나 스토리 이벤트에서 나온다. 게임플레이 자체에서 관계의 감정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왜 그럴까. AI와 이 주제를 깊이 파봤다.

게임의 기본 구조가 감정과 맞지 않는다

대부분의 게임은 도전-보상 구조로 되어 있다. 적을 쓰러뜨리면 경험치를 얻고, 퀘스트를 완료하면 보상을 받고,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면 다음으로 넘어간다. 이 구조가 만드는 감정은 성취감, 긴장감, 쾌감이다. 강렬하지만, 관계에서 오는 감정과는 결이 다르다.

관계의 감정은 효율과 정반대에 있다. 사람을 좋아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불안하고, 비합리적이고, 통제할 수 없다. 게임의 도전-보상 구조는 이런 감정과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AI가 이걸 "루도내러티브 부조화(Ludonarrative Dissonance)"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게임플레이가 요구하는 행동과 서사가 전달하려는 감정이 어긋나는 현상. RPG에서 세계를 구하는 긴박한 스토리가 진행되는 와중에, 플레이어는 느긋하게 낚시를 하거나 부업을 뛰고 있는 상황. 이러면 감정의 일관성이 깨진다.

미연시에는 이 부조화가 없다. 게임플레이 자체가 관계이고, 서사도 관계이다. 하는 행동과 느끼는 감정이 일치한다. 이 일치가 감정의 깊이를 만든다.

흥미로운 건, 이 부조화를 의도적으로 활용하는 게임도 있다는 점이다. 언더테일은 RPG의 전투 시스템 자체를 감정 장치로 바꿨다. "적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는 선택이 전투 시스템 안에 내장되어 있고, 그 선택이 관계와 감정에 직결된다. 이건 루도내러티브 부조화를 해결한 드문 사례인데, 여기서도 핵심은 "시스템과 감정의 정렬"이라는 같은 원리가 작동한다.

전투가 관계를 방해한다

RPG에서 동료 캐릭터와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같이 여행하고, 전투하고, 대화한다. 관계가 형성될 여지는 있다. 실제로 좋아하는 동료 캐릭터가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 관계의 깊이는 제한적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전투에 쓰기 때문이다. 동료와의 상호작용은 전투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이벤트에 불과하다. 관계가 게임의 부산물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리고 전투 시스템은 관계의 감정과 충돌한다. 전투에서 동료는 "유닛"이다. DPS가 높은 캐릭터를 파티에 넣고, 효율이 떨어지는 캐릭터는 빼야 한다. "이 캐릭터를 좋아하지만 전투력이 낮아서 못 쓰겠다"는 상황은 감정과 시스템의 충돌이다.

미연시에는 이런 충돌이 없다. 캐릭터를 좋아하는 이유가 능력치 때문이 아니라 그 캐릭터 자체 때문이다. 시스템이 감정을 방해하지 않는다.

오픈월드의 역설

오픈월드 게임은 자유도가 높다. 원하는 곳에 가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자유가 오히려 감정의 깊이를 방해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할 게 너무 많으면 하나에 집중할 수 없다. NPC와의 관계가 시작되려는 순간, 저쪽에서 퀘스트 알림이 뜬다. 대화를 나누다가도 지도 위의 미탐험 지역이 신경 쓰인다. 관심이 분산되면 감정이 깊어질 수 없다.

미연시는 의도적으로 자유를 제한한다. 갈 수 있는 곳이 정해져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어 있다. 이 제한이 오히려 집중을 만든다. 캐릭터 외에 신경 쓸 게 없으니까, 캐릭터에게 온전히 집중하게 된다.

자유가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니다. 감정의 깊이는 제한된 공간에서 더 잘 자란다. 이건 게임뿐 아니라 모든 서사에 적용되는 원리다. 영화가 두 시간이라는 제한 안에서 감정을 농축하듯, 미연시도 선택지라는 제한된 상호작용 안에서 감정을 농축한다.

AI에게 이 점을 짚었더니 재미있는 비유가 돌아왔다. "정원과 야생의 차이"라고. 오픈월드는 야생이다. 어디서든 꽃이 필 수 있지만, 정원사가 의도한 대로 피지는 않는다. 미연시는 정원이다. 한정된 공간에 의도적으로 배치한 꽃이 제때 피도록 설계되어 있다. 두 가지 모두 아름다울 수 있지만, 감정의 정밀한 설계에는 정원이 유리하다.

멀티플레이의 문제

온라인 게임에서 다른 플레이어와 감정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그건 게임이 설계한 감정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감정이다.

게임이 설계한 감정과 자연 발생한 감정은 다르다. 설계된 감정은 의도적으로 특정 순간에 특정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자연 발생한 감정은 통제할 수 없고 예측할 수도 없다.

미연시는 철저하게 설계된 감정을 다루는 장르다. 시나리오 작가가 어디서 어떤 감정이 나올지를 계산하고, 그에 맞춰 텍스트와 선택지를 배치한다. 이 정밀한 설계가 가능한 이유는, 상대가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 아니라 예측 가능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상대가 가짜이기 때문에 감정 설계가 가능하다. 진짜 사람이면 반응을 통제할 수 없으니까.

감정의 순도

여기서 AI와 흥미로운 토론이 벌어졌다. "그러면 미연시의 감정은 순수한 건가, 조작된 건가?"

AI의 답은 이랬다. 모든 서사적 감정은 조작이다. 소설가가 독자의 감정을 조작하고, 영화감독이 관객의 감정을 조작한다. 미연시의 시나리오 작가도 플레이어의 감정을 조작한다. 차이는 조작의 도구가 다를 뿐이다. 소설은 문장으로, 영화는 영상으로, 미연시는 선택으로.

맞는 말이지만, 한 가지 추가할 게 있다. 미연시에서의 "조작"은 다른 매체보다 플레이어의 참여가 깊다. 소설이나 영화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감정이다. 미연시는 선택을 통해 능동적으로 참여한 결과로 오는 감정이다. 이 참여감이 감정의 순도를 높인다.

내가 고른 선택의 결과로 슬프다면, 그건 작가가 만든 슬픔이기도 하지만 내가 만든 슬픔이기도 하다. 이 이중성이 미연시 감정의 본질이다.

다른 게임이 배울 수 있는 것

다른 장르의 게임이 미연시에서 배울 수 있는 건 뭘까. 모든 게임이 연애를 넣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핵심은 이거다.

게임플레이와 감정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게 하라. 전투 중에 감정을 넣으려면, 전투 시스템 자체가 감정을 지원해야 한다. 탐험 중에 관계를 만들려면, 탐험 구조 자체가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감정을 컷신에 떼어놓으면, 그건 게임의 감정이 아니라 영화의 감정이다.

이건 미연시를 만드는 데도 중요한 원칙이다. 모든 시스템이 감정을 향해야 한다. 선택지도, 분기도, 변수도, 장면 전환도. 감정에 기여하지 않는 요소는 빼야 한다.

그래서 이건 게임의 한계인가?

여기까지 분석하고 나니, 처음 질문에 대한 답이 보인다. 다른 게임이 감정을 못 끌어내는 건 게임이라는 매체의 한계가 아니다. 게임의 목적 설정과 시스템 설계의 문제다.

대부분의 게임은 감정이 목적이 아니다. 도전, 탐험, 성취, 재미가 목적이다. 거기에 감정을 얹으려 하니 어색해지는 거다. 미연시는 처음부터 감정이 목적이다. 모든 시스템이 그 목적을 향해 정렬되어 있다.

이건 우열의 문제가 아니다. 목적이 다를 뿐이다. 다만, 감정을 설계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미연시의 구조에서 배울 게 많다. 게임플레이와 감정의 정렬, 제한을 통한 집중, 선택을 통한 참여. 이 원칙들은 장르를 넘어서 적용 가능하다.

다음 편에서는 시선을 게임 바깥으로 돌린다. 영화나 소설은 어떻게 감정을 전달하는가. 그리고 미연시는 그 방식과 뭐가 같고, 뭐가 다른가.


다음 편: 영화나 소설이라면 어떤 느낌인가 — 매체별 감정 전달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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