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스타트업 — 딸깍으로 만든 제품은 딸깍으로 복사된다

요즘 창업 관련 콘텐츠에서 반복되는 말이 있다.

"AI 덕분에 개발자 없이도 앱을 만들 수 있다", "아이디어만 있으면 혼자서도 스타트업을 시작할 수 있는 시대다", "기술 장벽이 사라졌다." 틀린 말이 아니다. 실제로 노코드 툴과 AI 코딩 도구의 조합으로 MVP를 빠르게 뽑아내는 사람들이 늘었다. 몇 년 전이라면 개발팀이 필요했을 작업을 혼자서, 그것도 훨씬 짧은 시간 안에 해내는 사례가 분명히 있다.

근데 그 말의 뒷면을 뒤집어보면 불편한 문장이 나온다.

누구나 같은 걸 만들 수 있다.

진입장벽이 낮아졌다는 건 나한테만 낮아진 게 아니다. 경쟁자한테도 똑같이 낮아졌다. 내가 AI로 3일 만에 만든 걸, 다른 누군가도 AI로 3일 만에 복사할 수 있다. 차별화가 실행 속도에서 나오던 시대는 이미 끝났거나 끝나가고 있다.

그러면 뭐로 승부하냐.


진입장벽이 낮아지면 생기는 일

시장에 진입장벽이 낮아지면 단기적으로 참여자가 늘어난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면 가격 경쟁이 시작된다. 차별화 포인트가 없으면 가격밖에 남지 않고, 가격 경쟁은 자본이 많은 쪽이 이긴다.

이건 AI 시대의 법칙이 아니라 시장의 오래된 법칙이다.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도 비슷한 얘기가 나왔다. "이제 누구나 쇼핑몰을 만들 수 있다." 맞는 말이었다. 근데 그 결과가 모든 쇼핑몰의 번영이 아니라 아마존과 쿠팡의 독점이었다. 기술 진입장벽이 낮아진 자리를 도메인 깊이와 자본이 채웠다.

스마트폰 앱 생태계도 마찬가지였다. 앱스토어가 열리면서 개인 개발자가 대기업과 같은 플랫폼에서 경쟁할 수 있게 됐다. 초기엔 실제로 개인 개발자들이 대박을 냈다.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앱 마켓은 포화됐고, 사용자 획득 비용이 올라갔고, 결국 마케팅 자본과 브랜드 인지도가 있는 곳이 살아남았다.

AI도 같은 경로를 밟고 있다.

지금은 "AI로 만든 제품"이라는 것 자체가 신기하던 시기가 지나가고 있다. 초기에 AI 기반 글쓰기 도구, AI 기반 이미지 생성 서비스, AI 기반 요약 툴들이 쏟아졌다. 그 중 살아남은 건 AI를 썼기 때문이 아니라 특정 도메인에서 깊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AI는 수단이었고, 차별화는 다른 데서 나왔다.


"같은 주제로 창업 가능하다"의 진짜 의미

AI가 도메인을 이해해준다는 말을 창업 맥락에서 풀면 이런 주장이 된다.

"법률 지식 없이도 AI로 법률 서비스를 만들 수 있다. 의료 지식 없이도 AI로 헬스케어 앱을 만들 수 있다. 금융 전문가가 아니어도 AI로 투자 분석 툴을 만들 수 있다."

이 주장이 맞는 부분이 있다. AI가 법률 문서 요약을 해주고, 의학 용어를 풀어주고, 재무제표를 분석해주는 건 실제로 가능하다. 그 기능을 UI로 감싸서 서비스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근데 거기서 멈추는 게 문제다.

법률 서비스를 만든다고 해보자. AI가 계약서 검토를 해준다. 꽤 잘 한다. 근데 그 서비스의 실제 사용자가 누구냐에 따라 필요한 게 완전히 달라진다. 스타트업 창업자가 쓰는 거냐, 중소기업 법무팀이 쓰는 거냐, 개인이 임대차 계약서를 검토하는 거냐. 각각의 사용자가 어떤 언어로 질문하고, 어떤 형식의 출력을 원하고, 어떤 맥락에서 그 정보를 쓰는지 — 이건 AI가 법률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사용자를 직접 만나고, 실패하고, 피드백을 받고, 수정하면서 쌓이는 도메인이다.

의료도 마찬가지다. AI가 증상을 입력받고 가능한 질환 목록을 뽑아주는 건 기술적으로 어렵지 않다. 근데 그 서비스를 실제로 병원에 납품하거나, 환자가 쓰게 만들거나, 보험 청구 시스템과 연동하거나, 의료기기 인증을 받는 과정 — 이건 AI가 알 수 없는 도메인이다. 규제, 관행, 이해관계자 구조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그걸 아는 사람이 따로 있다.

AI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그 지식을 특정 맥락에서 제대로 작동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일이다. 전자는 AI가 하고, 후자는 사람이 한다. 그 후자의 작업이 도메인 깊이고, 그게 없으면 서비스가 아니라 데모에 머문다.


딸깍으로 만든 서비스가 실제로 어떻게 망가지는가

추상적인 얘기보다 구체적인 시나리오가 낫다.

AI로 부동산 투자 분석 서비스를 만든다고 해보자. 주소를 입력하면 주변 시세, 임대 수익률, 향후 가격 전망을 뽑아주는 서비스. AI가 데이터를 긁어오고 분석하는 부분은 꽤 그럴싸하게 만들어진다. MVP를 뽑는 데 2주도 안 걸릴 수 있다.

근데 실제 사용자가 붙기 시작하면 문제가 쌓인다.

서울 특정 재건축 단지는 실거래가와 호가가 극단적으로 차이나는데, 그 차이가 왜 생기는지를 모르면 분석 결과가 엉터리가 된다. 토지거래허가구역 지정 여부가 투자 가능 여부를 바꾸는데, 그 규제가 어느 지역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공공 API에 깔끔하게 정리돼 있지 않다. 재개발 조합원 입주권과 일반 분양의 차이, 분양권 전매 제한 기간, 취득세 중과 기준 — 이런 것들이 실제 투자 결정에 결정적인데, AI가 일반적인 부동산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이 맥락을 자동으로 처리하지 못한다.

사용자는 틀린 분석 결과를 받고 떠난다. 아니면 더 나쁜 경우, 그 결과를 믿고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

이게 "딸깍으로 만든 서비스"의 한계다. 기능은 작동하는데 도메인이 빠진 서비스. 겉으로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실제 사용 맥락에서 무너진다.

그리고 이 약점은 경쟁자도 똑같이 가지고 있다. 차이가 없다. AI로 빠르게 만든 서비스들이 시장에 쏟아지는데, 도메인 깊이가 없으면 전부 비슷한 수준에서 경쟁하게 된다. 가격을 낮추거나, 디자인을 다듬거나, 마케팅에 돈을 쓰거나 — 도메인 외의 것들로 차별화를 시도하게 된다. 그 싸움은 자본이 많은 쪽이 유리하다.


속도는 해자가 아니다

"AI로 빠르게 만드는 게 경쟁력"이라는 말이 많다. 맞는 말이다. 빠른 게 좋다. 근데 빠른 게 지속 가능한 경쟁 우위가 되려면, 빠르게 쌓은 것이 복사하기 어려운 무언가로 이어져야 한다.

기술 스타트업에서 해자(moat)라고 부르는 개념이 있다. 경쟁자가 쉽게 넘어올 수 없게 만드는 구조적 우위. 네트워크 효과, 전환 비용, 규모의 경제, 독점 데이터, 브랜드 — 이런 것들이 전통적인 해자였다.

AI 시대에 새롭게 추가되는 해자가 하나 있다. 도메인 데이터와 도메인 피드백 루프.

사용자가 쓸수록 그 서비스가 해당 도메인에 특화된 데이터를 축적하고, 그 데이터로 모델을 파인튜닝하거나 RAG 파이프라인을 고도화하면, 후발주자가 같은 AI 도구를 써도 따라잡기 어려운 격차가 생긴다. 근데 이 루프가 작동하려면 도메인을 이해하는 사람이 어떤 데이터를 어떻게 쌓을지를 설계해야 한다. AI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루프가 아니다.

속도는 초기 시장 진입에서 유리하다. 근데 시장에 들어간 다음에는 속도보다 깊이가 생존을 결정한다. 빠르게 만들어서 빠르게 배우고, 그 배움을 도메인 깊이로 전환하는 과정이 없으면 — 빠르게 만들어서 빠르게 사라지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아이디어는 보호받지 못한다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자주 하는 실수 중 하나가 아이디어를 과대평가하는 거다. "이 아이디어를 남이 베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하는데, 현실에서 아이디어 자체는 거의 보호받지 못한다. 실행이 전부고, 실행 중에 쌓이는 도메인 지식이 진짜 자산이다.

AI가 실행 비용을 낮춰줬다. 좋은 일이다. 근데 실행 비용이 낮아졌다는 건 아이디어에서 프로토타입까지의 거리가 짧아졌다는 뜻이지, 프로토타입에서 살아남는 서비스까지의 거리가 짧아졌다는 뜻이 아니다.

같은 아이디어로 누구나 창업할 수 있다. 법률 AI, 의료 AI, 부동산 AI, 교육 AI — 지금 이 카테고리에 이미 수십 개씩 서비스가 존재한다. 거기서 살아남는 건 AI를 가장 잘 쓰는 곳이 아니라, 그 도메인의 사용자를 가장 잘 이해하는 곳이다. 사용자가 어떤 맥락에서 그 서비스를 쓰는지, 어떤 언어로 문제를 표현하는지, 어디서 막히는지 — 이걸 아는 건 AI가 아니라 그 도메인 안에서 시간을 보낸 사람이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AI가 진입장벽을 낮춘 결과는 도메인 전문성의 가치가 올라가는 거다. 기술 장벽이 낮아졌으니 기술로는 승부가 안 되고, 결국 남는 건 도메인이다.


그럼 뭘로 창업하냐

이 맥락에서 창업을 생각한다면 질문이 바뀌어야 한다.

"AI로 뭘 만들 수 있나"가 아니라 "내가 직접 겪은 문제가 뭔가"로.

직접 겪은 문제라는 건 그 도메인 안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 업계에서 일했거나, 그 서비스의 헤비 유저였거나, 그 문제를 반복적으로 만났거나. 그 경험이 도메인 지식의 원천이고, 그게 없으면 AI가 아무리 뛰어나도 서비스의 핵심이 비어 있게 된다.

10년 동안 병원 원무과에서 일한 사람이 의료 행정 AI 툴을 만들면, 병원 도메인을 모르는 사람이 "병원에 필요한 AI"를 만드는 것과 출발점부터 다르다. 전자는 실제로 어디서 병목이 생기는지, 어떤 규정이 예외를 만드는지, 어떤 말로 설명해야 의사와 간호사가 이해하는지를 안다. AI는 그 지식을 증폭시켜준다. 없는 지식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창업의 경쟁력은 AI를 얼마나 잘 다루느냐가 아니라, AI를 어떤 도메인 위에서 다루느냐에서 갈린다.


딸깍 경쟁의 끝

모두가 AI로 딸깍할 수 있는 세상에서 딸깍 자체는 경쟁력이 아니다.

이미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 AI 도구를 쓴다는 것 자체가 특별하던 시기는 지났다. 이제 쓰는 게 기본이고, 그 위에서 뭘 만드냐가 질문이다.

뭘 만드냐는 결국 어떤 도메인을 얼마나 깊이 아느냐로 돌아온다. AI는 그 도메인을 코드로 구현하는 속도를 높여준다. 근데 도메인을 이해하는 작업, 사용자를 만나서 피드백을 받는 작업, 실패를 통해 맥락을 쌓는 작업 — 이건 AI가 단축해주지 못한다.

빠르게 만들어서 빠르게 시장에 나가는 건 여전히 중요하다. 근데 그다음이 있어야 한다. 시장에 나간 다음에 도메인을 파고드는 과정이 없으면, 결국 누군가 더 빠르게 복사한 서비스한테 자리를 내준다.

딸깍으로 만든 건 딸깍으로 복사된다.

그 복사를 막는 건 도메인 깊이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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