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이 "게임 디자인"인 게시물 표시

이건 게임의 한계인가, 설계의 한계인가

  지금까지 미연시의 감정이 왜 특별한지, 다른 매체와 어떻게 다른지를 분석했다. 미연시라는 장르가 감정을 다루기에 좋은 구조라는 건 확인했다. 그런데 현실의 미연시 대부분은 그 잠재력을 다 쓰지 못한다. 많은 미연시가 감정보다는 "공략"에 가까운 경험을 제공한다. 왜 그런 걸까. AI와 함께 기존 미연시의 구조적 문제를 파봤다. 호감도+1의 세계 대부분의 미연시는 이런 구조다. 선택지 A를 고르면 캐릭터의 호감도가 1 오른다. 선택지 B를 고르면 호감도가 변하지 않거나 내려간다. 호감도가 일정 수치를 넘으면 연애 루트에 진입한다. 호감도가 부족하면 배드엔딩이나 노멀엔딩으로 빠진다. 이 시스템은 구현이 쉽다. 변수 하나, 조건문 몇 개면 된다. 테스트도 간단하다. 밸런싱도 직관적이다. 제작 비용이 낮으니까 대부분의 미연시가 이 구조를 채택한다. 그런데 이 구조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AI에게 "기존 미연시의 호감도 시스템을 분석해달라"고 했을 때, 돌아온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많은 미연시가 감정을 시뮬레이션하는 게 아니라, 루트 해금 조건만 관리한다." 정확한 진단이었다. 그리고 이 한 문장이 문제의 핵심을 찌른다. 문제 1: 관계가 숫자로 환원된다 호감도 시스템에서 관계는 0에서 100 사이의 정수다. 좋아함도 100, 신뢰도 100이면 둘이 같아진다. 하지만 현실에서 "좋아하지만 못 믿는" 관계는 얼마든지 있다. "존경하지만 사랑은 아닌" 관계도 있다. "싫은데 떨어질 수 없는" 관계도 있다. 단일 수치는 이런 복잡함을 담을 수 없다. 관계를 하나의 축으로 접어버리면, 관계의 미묘함이 사라진다. 그리고 미묘함이 사라진 관계에서는 감정이 나오지 않는다. AI에게 이 문제를 짚었더니, 바로 공감하면서 실생활 예시를 들었다. "사랑과 신뢰가 동시에 높을 수도 있지만, 사랑은 높고 신뢰는 낮은 상태도 현실적이다. 호감도 하나로는 이 차이를 표현...

왜 다른 게임들은 감정을 못 끌어내는가

  미연시에서 감정이 나오는 원리를 분석했다. 그렇다면 반대 질문이 자연스럽다. 다른 게임들은 왜 그걸 못 할까? 물론 "못 한다"는 건 과장이다. 라스트 오브 어스에서 눈물 흘린 사람도 있고, 파이널 판타지에서 가슴이 먹먹해진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대부분 컷신이나 스토리 이벤트에서 나온다. 게임플레이 자체에서 관계의 감정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왜 그럴까. AI와 이 주제를 깊이 파봤다. 게임의 기본 구조가 감정과 맞지 않는다 대부분의 게임은 도전-보상 구조로 되어 있다. 적을 쓰러뜨리면 경험치를 얻고, 퀘스트를 완료하면 보상을 받고,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면 다음으로 넘어간다. 이 구조가 만드는 감정은 성취감, 긴장감, 쾌감이다. 강렬하지만, 관계에서 오는 감정과는 결이 다르다. 관계의 감정은 효율과 정반대에 있다. 사람을 좋아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불안하고, 비합리적이고, 통제할 수 없다. 게임의 도전-보상 구조는 이런 감정과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AI가 이걸 "루도내러티브 부조화(Ludonarrative Dissonance)"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게임플레이가 요구하는 행동과 서사가 전달하려는 감정이 어긋나는 현상. RPG에서 세계를 구하는 긴박한 스토리가 진행되는 와중에, 플레이어는 느긋하게 낚시를 하거나 부업을 뛰고 있는 상황. 이러면 감정의 일관성이 깨진다. 미연시에는 이 부조화가 없다. 게임플레이 자체가 관계이고, 서사도 관계이다. 하는 행동과 느끼는 감정이 일치한다. 이 일치가 감정의 깊이를 만든다. 흥미로운 건, 이 부조화를 의도적으로 활용하는 게임도 있다는 점이다. 언더테일은 RPG의 전투 시스템 자체를 감정 장치로 바꿨다. "적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는 선택이 전투 시스템 안에 내장되어 있고, 그 선택이 관계와 감정에 직결된다. 이건 루도내러티브 부조화를 해결한 드문 사례인데, 여기서도 핵심은 "시스템과 감정의 정렬"이라는 같은 원리가 작동한다....

짧은 시간 안에 감정을 끌어내는 법

  이전 편에서 감정은 시간이 만든다고 했다. 그런데 모순이 있다. 미연시는 무한히 길 수 없다. 플레이어의 시간은 유한하다. 몇 시간, 길어야 십몇 시간 안에 캐릭터와의 관계에서 진짜 감정이 나오게 만들어야 한다. 영화는 두 시간 안에 사람을 울린다. 단편 소설은 만 자도 안 되는 분량으로 여운을 남긴다. 그들은 어떻게 그걸 하는 걸까. 그리고 미연시는 그것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감정 밀도라는 개념 AI와 이 주제로 대화하면서, 하나의 개념이 정리됐다. 감정 밀도(Emotional Density). 감정 밀도란, 단위 시간당 플레이어가 경험하는 감정적 변화의 농도다. 같은 30분이라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30분과 관계의 결정적 순간이 담긴 30분은 완전히 다르다. 감정 밀도가 높다고 좋은 건 아니다. 계속 높으면 피로해진다. 반대로 계속 낮으면 지루하다. 중요한 건 밀도의 조절, 즉 리듬이다. AI가 이걸 음악에 비유했다. 곡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클라이맥스 자체가 아니라, 조용한 파트에서 클라이맥스로 넘어가는 순간이라고. 미연시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낮은 밀도에서 갑자기 밀도가 높아지는 그 전환 지점에서 감정이 터진다. 보여주는 것과 숨기는 것 짧은 시간 안에 감정을 만드는 첫 번째 기술은 정보의 비대칭이다. 영화에서 흔히 쓰는 기법이 있다. 관객은 알지만 캐릭터는 모르는 상황. 혹은 캐릭터는 알지만 관객은 모르는 상황. 이 간극이 긴장을 만든다. 미연시에서도 마찬가지다. 플레이어가 아는 것과 캐릭터가 아는 것이 다를 때, 감정이 생긴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는 캐릭터의 과거를 알고 있는데 주인공은 모르는 상태. 주인공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캐릭터에게 상처가 되는 장면. 플레이어는 "아, 저 말을 하면 안 되는데"를 알고 있지만 막을 수 없다. 이 무력감이 감정을 만든다. 반대로, 캐릭터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플레이어가 감지하지만 확인할 수 없는 상태.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