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오스크가 줄인 고용, 늘린 근로시간

밝은 매장 안 무인 주문 키오스크 앞에서 한 사람이 화면을 향해 멈춰 서 있는 뒷모습

어제 마트 계산 줄에 서서 앞사람 손을 보고 있었습니다. 예순쯤 되어 보이는 분이었는데 폰을 단말기에 툭 대고 삼성페이로 결제하는 데 3초도 안 걸렸습니다. 저는 거기서부터 머릿속으로 세대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분들이 인터넷 보급기를 통과한 세대니까 디지털 전환이 상대적으로 수월했던 거라고. 60대와 70대가 리니지 오토를 돌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꽤 그럴듯하게 조립됐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저는 통신사 ARS에서 상담원을 못 찾아 같은 메뉴를 세 바퀴 돌았고, 그 가설은 필요가 없어졌다…

세대로 설명하려던 문제가 세대와 무관한 자리에서 저를 붙잡은 겁니다. 제가 헤맨 건 학습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스템에는 제가 가려는 곳으로 가는 길이 아예 없었습니다.

세대는 변수가 아니었습니다

먼저 제가 틀린 부분을 정확히 해두자. 2026년 기준 X세대는 1965년에서 1980년 사이에 태어난 46세부터 61세까집니다. 마트에서 본 예순 남짓한 분은 X세대 끝단이 아니라 베이비붐 세대에 더 가깝습니다. 리니지 오토를 돌리는 60대와 70대도 대부분 붐 세대입니다. 이 구분을 뭉개면 아무 얘기도 못 합니다.

그런데 구분을 정확히 해도 설명이 안 되는 게 남습니다. 젊은 사람도 키오스크에서 막힙니다. 저는 하루의 절반을 터미널에서 보내는 사람인데, 처음 보는 무인 주문기 앞에서 뒷사람 눈치를 본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화면 어디를 눌러야 다음으로 가는지 몰라섭니다. 세대가 진짜 원인이라면 이런 일은 안 생겨야 합니다.

그래서 시니어 얘기를 원인 자리에서 빼기로 했습니다. 시니어는 이 시스템의 결함이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증상이 제일 선명한 곳이 원인은 아닙니다.

번호가 매번 바뀌는 ARS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ARS 풍자 영상의 대본을 하나 읽었습니다. 가상의 에어컨 회사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상담원을 찾아가는 코미디 스케치인데, 웃다가 중간에 등이 서늘해졌습니다. 과장은 됐지만 과장의 방향이 정확했습니다.

대본에서 벌어지는 일을 설계 결함으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메뉴 번호가 다시 걸 때마다 바뀝니다. 냉방이 안 되는 경우가 처음엔 5번이었는데 다음 호출에서 4번이 됩니다. 제품 세척은 11번에서 65번으로, 요금 문의는 14번에서 9번으로 옮겨갑니다. 상담원 연결은 327번, 117번, 23번으로 세 번 바뀝니다. 이건 불친절이 아니라 훨씬 나쁜 겁니다. 사용자가 경로를 학습하는 걸 구조적으로 막습니다. 두 번째 통화가 첫 번째 통화보다 빨라야 정상인데, 안정된 주소가 없으면 매 통화가 첫 통화입니다. 사용자 쪽에서 캐싱이 불가능한 인터페이스입니다.

상담원 연결이 고객 만족도 조사와 같은 메뉴에 묶여 있습니다. 대본의 화자가 여기서 폭발하는데, 저도 같은 지점에서 웃음이 멈췄습니다. 사람에게 가는 길을 아무도 자발적으로 안 누르는 항목 뒤에 붙여둔 겁니다. 이게 우연히 그렇게 배치될 확률은 낮습니다.

기다리면 챗봇으로 강제 전환됩니다. "보다 빠른 상담을 위해 챗봇 상담으로 전환하겠습니다." 사람을 기다리겠다고 명시적으로 선택한 사용자를 봇으로 되돌립니다. 방향이 거꾸로입니다. 그리고 그 챗봇은 ARS가 이미 한 말을 반복합니다. 전원을 껐다 켜보라고.

컨텍스트가 핸드오프에서 소실됩니다. 대본 마지막이 압권입니다.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이름을 확인하고, 그렇게 사람에게 연결됐는데 상담원이 주민번호 앞자리를 또 묻습니다. 앞자리는 시스템에 입력이 안 된다면서. 그리고 그 확인 도중에 통화가 끊깁니다.

대기 추정치가 흔들립니다. 앞에 127명, 예상 160분이라던 게 잠시 뒤 52명, 62분이 됩니다. 화자의 반응이 정확합니다. "이거 사기잖아." 부정확한 추정치는 정보를 주는 대신 남아 있던 신뢰를 깎습니다. 아무 숫자도 안 주는 것보다 나쁩니다.

제가 겪은 건 이 정도로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상담원 연결이 트리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같습니다. 저는 시스템이 처리하지 못하는 요청을 들고 있었고, 그 요청을 어디로 보내야 하는지 시스템이 정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이 글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자동화의 품질은 처리하는 것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처리하지 못하는 것을 어디로 보내는지로 결정됩니다.

70만 대를 깔면서 준비한 것과 안 한 것

국내 키오스크 보급 대수는 2021년 21만 33대에서 2022년 45만 4,741대, 2023년 53만 6,602대로 늘었습니다. 2년 만에 2.5배입니다. 2026년 3월 기준으로는 약 70만 대 수준이라는 추정 보도가 있습니다. 이건 1차 통계가 아니라 추정이라 그대로 받지는 않습니다.

같은 기간 접근성은 어땠나.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조사에서 나온 준수율이 이렇습니다.

항목 준수율
조작부 높이가 휠체어에서 닿는가 4%
음성 등 대체 콘텐츠를 제공하는가 10.5%
터치스크린을 안 보고도 조작 가능한가 12.2%
시간 제한을 연장할 수 있는가 10.2%

조작부 높이 4%. 100대 중 96대는 휠체어를 탄 사람이 화면 위쪽에 손이 안 닿습니다.

그런데 예산은 줄었습니다. 디지털 격차 해소 기반 사업 예산이 2023년 89.5억 원에서 2024년 71억 원, 2025년 계획 56억 원으로 내려갔습니다. 키오스크 화면 설계 자체를 다루는 UI 플랫폼 사업은 33.5억 원에서 8.7억 원으로 4분의 1이 됐습니다. 기기를 2년에 2.5배로 늘리는 동안 그 기기를 쓸 수 있게 만드는 예산은 3년 연속 깎았습니다.

고령층 쪽 숫자도 붙여둡니다. 2024 디지털정보격차 실태조사(2025년 3월 발표) 기준 고령층의 디지털정보화 수준은 일반 국민 대비 71.8%다. 저소득층이 97.0%, 장애인이 84.1%, 농어민이 80.6%인 것과 비교하면 눈에 띄게 낮습니다. 같은 조사를 인용한 보도에서 키오스크로 주문하거나 접수해 본 고령층 비율은 17.9%로 나왔습니다.

재밌는 건 고령층이 디지털을 못 쓰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카카오톡과 유튜브에서는 활용도가 높습니다. 금융과 소비, 행정으로 넘어가면 급격히 떨어집니다. 무엇이 다른가. 카카오톡은 틀려도 되돌릴 수 있고, 뒷사람이 안 기다리고, 실패해도 손해가 없습니다. 키오스크는 세 가지가 다 반대입니다. 이건 능력 격차가 아니라 실패 비용 격차입니다.

인건비는 어디로 갔나

여기가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입니다.

한국고용정보원이 2024년 7월에 서울 음식점 2,000곳을 조사해 발표한 결과를 보면, 키오스크를 설치한 가게에서 판매직과 서빙직 고용이 11% 줄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입니다.

그런데 남은 사람들의 주당 근로시간이 약 2시간 늘었습니다.

보고서의 설명이 이 글의 논지를 그대로 말해줍니다. 키오스크 1대가 노동자 1명을 완전히 대체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용 방법을 안내해야 하고, 대면 서비스를 원하는 손님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떠난 동료의 업무량을 남은 사람이 흡수했습니다.

같은 조사에서 태블릿 주문은 결과가 갈렸습니다. 고용은 7.5% 줄었고 주당 근로시간도 약 1시간 52분 줄었습니다. 고용과 시간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왜 다를까. 태블릿은 테이블에 놓여 있습니다. 손님이 앉은 자리에서 주문하니까 주문을 받으러 가는 업무 자체가 사라집니다. 키오스크는 입구에 서 있고, 손님이 그 앞에서 막히면 직원이 가야 합니다. 태블릿은 업무를 없앤 거고 키오스크는 업무를 옮긴 겁니다.

이 차이가 자동화 설계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자동화는 일을 삭제하고, 어떤 자동화는 일의 위치를 바꿉니다. 도입 결정을 하는 사람은 대부분 이 둘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둘 다 "자동화"라는 같은 단어로 결재를 받습니다.

그리고 옮겨진 일은 원래 장부에 안 찍힙니다. 인건비 항목은 11% 줄었다고 나옵니다. 남은 사람이 주당 2시간을 더 일한 건 인건비 절감 보고서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지표는 개선됐고 총 노동량은 그대로거나 늘었습니다.

두 번째 장부, 서울시 디지털 안내사 815명

옮겨진 비용이 어디까지 가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서울시가 2022년 하반기부터 디지털 안내사를 운영합니다. 주황색 조끼를 입고 2인 1조로 지하철역과 대형마트, 공원 같은 곳을 순회하면서 키오스크 사용법과 앱 설치, 기차표 예약, 택시 호출을 도와주는 사람들입니다. 서울시 발표에 따르면 3년 동안 누적 815명이 위촉됐고, 약 69만 명을 응대했습니다. 그중 90% 정도가 60대 이상이었습니다. 이용자 만족도는 98%다. 2025년 하반기에는 125명이 서울 25개 자치구 310여 곳을 돌았습니다.

만족도 98%. 사람이 옆에서 대신 눌러주면 만족합니다. 당연합니다.

이 사업 자체는 좋은 일입니다. 저는 이걸 비판하려는 게 아닙니다. 제가 보는 건 돈의 경로입니다. 자영업자와 기업이 인건비를 줄이려고 키오스크를 깔았습니다. 그 키오스크를 못 쓰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 사람을 도와주는 인력을 지방자치단체가 세금으로 고용했습니다.

인건비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민간 장부에서 공공 장부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장부가 다르니까 양쪽 다 각자의 숫자만 보면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가게는 인건비를 줄였고, 시는 디지털 포용 정책을 집행했습니다. 둘을 겹쳐놓고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느 나라에는 키오스크를 대신 눌러주는 직업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저는 그게 해외 사례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찾아보니 한국이었습니다. 3년 누적 815명입니다.

이런 식으로 도입의 주어가 흐려지는 문제는 사내 AI 도입에서도 똑같이 반복됩니다. 전에 AX라는 말이 회사 단위로 팔리는데 실제 격차는 옆자리 사이에서 벌어진다는 글을 썼는데, 구조가 같습니다. 비용과 효과를 재는 장부가 서로 다른 층에 있으면 아무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 전체가 틀린 결론에 도달합니다.

자동화율 80%는 절감률 80%가 아닙니다

기술적으로 왜 이렇게 되는지 따라가 보자.

어떤 창구에 들어오는 요청의 분포를 보면 상위 몇 개 패턴이 트래픽의 대부분을 먹습니다. 카페라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압도적이고, 통신사 콜센터라면 요금 조회와 납부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동화 커버리지는 놀랍게 빨리 올라갑니다. 스무 개 남짓한 시나리오만 구현해도 요청 수 기준으로 8할쯤은 덮입니다. 정확한 비율은 업종마다 다르니 이건 어림으로 읽어주면 됩니다.

문제는 남는 2할입니다. 이 잔차는 단순히 수가 적은 요청이 아닙니다. 평균적으로 훨씬 어려운 요청입니다.

  • 자동화가 못 잡는 이유가 있어서 남았습니다. 조건이 복합적이거나, 예외 규정이 걸리거나, 애초에 사용자가 뭘 원하는지 문장으로 정리하지 못합니다
  • 자동화를 먼저 시도했다가 실패해서 온 사람들입니다. 이미 화가 나 있고, 이미 시간을 썼고, 이미 같은 설명을 두 번 들었습니다
  • 처리하려면 앞에서 자동화가 어디까지 했는지를 먼저 알아내야 합니다. 원래 없던 작업이 하나 늘었습니다

마지막 항목이 특히 비쌉니다. ARS 대본에서 상담원이 주민번호를 다시 묻는 장면이 정확히 이 비용입니다. 자동화 단계와 사람 단계 사이에 상태가 전달되지 않으면, 사람은 사용자를 처음부터 다시 받습니다. 자동화를 안 했을 때보다 더 오래 걸립니다.

그래서 실제 절감액은 이렇게 계산해야 합니다.

실제 절감 = (자동화된 요청 수 × 기존 단위 처리비)
          − (잔차 요청 수 × 상승한 단위 처리비)
          − 시스템 구축비와 유지비
          − 이용 안내에 들어가는 인건비
          − 이탈한 고객의 매출

잔차 항에 붙은 "상승한"이라는 말이 이 식의 전부인데, 도입 결정 문서에서 이 항을 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첫 줄만 계산합니다. 잔차는 처리비가 같다고 암묵적으로 가정합니다. 그 가정이 깨지는 정도가 한국고용정보원 조사에서 주당 2시간으로 나온 겁니다.

재밌는 반전 데이터가 하나 있습니다. 농림축산식품부의 2024년 외식업체 경영실태조사에서 키오스크를 실제로 운영 중인 외식업체는 12.9%였습니다. 비프랜차이즈 일반음식점은 7.3%로 더 낮았습니다. 체감상 온 세상이 키오스크인데 숫자는 이렇습니다.

저는 이걸 소규모 가게가 뒤처져서라고 읽지 않습니다. 잔차를 떠안을 사람이 없는 가게는 못 쓰는 겁니다. 사장 혼자 하는 집에서 키오스크 앞에 손님이 막히면 주방을 비워야 합니다. 프랜차이즈는 직원이 두세 명 있으니까 그 비용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잔차 처리 여력이 있는 곳만 자동화할 수 있다는 얘기고, 이건 자동화의 전제 조건이 인력이라는 뜻입니다. 순서가 거꾸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엇을 어디에 태울지 먼저 찾는 작업이 그래서 도입 자체보다 먼저 와야 합니다. 알고리즘 진화 같은 기법을 두고도 내 업무에 들일 자리를 먼저 찾아본 적이 있는데, 태울 자리가 명확할 때는 실제로 절감이 납니다. 브라우저 탭 일곱 개를 하나로 줄였던 경우가 그랬습니다. 그때 잘 된 이유는 제가 잔차를 직접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동화가 못 하는 건 제가 처리했고, 그 비용을 다른 사람 장부로 넘기지 않았습니다.

제가 만든 키오스크

여기까지 쓰면서 계속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남 얘기가 아니라섭니다.

제가 굴리는 자동화에 품질 게이트를 하나 박아뒀습니다. 2026년 5월 12일이었습니다. 배포 스크립트가 파일을 올리기 전에 _workspace/briefs/{slug}-ai-check.md 파일을 열어서 판정: 합격이라는 문자열을 찾고, 없으면 업로드를 차단하는 구조였습니다. 문체 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문서가 나가는 걸 막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그 문자열을 누가 썼는지가 문제였습니다.

검사받는 에이전트가 직접 썼습니다. 글을 쓴 모델이 자기 글을 검사하고, 검사 결과 파일에 판정: 합격이라고 적고, 발행 스크립트가 그 문자열을 확인하고 통과시켰습니다. 검문소와 통행증 발급처가 같은 건물에 있었습니다.

통과율은 100%였습니다. 저는 두 달 반 동안 그걸 게이트가 잘 작동하는 증거로 읽었습니다.

부수적으로 딸린 버그도 있었습니다. 같이 있던 품질 게이트는 파일 전체에서 \bFAIL\b를 찾아 하나라도 걸리면 차단했습니다. 그래서 검수 문서에 "FAIL 조건 없음"이라고 적으면 발행이 막혔습니다. 문제없다고 명시적으로 쓸수록 차단될 확률이 올라가는 구조였습니다.

실패 방향이 완전히 반대였다는 게 제일 별로입니다. 나쁜 글은 통과했습니다. 합격이라고 쓰면 됐습니다. 좋은 글은 막혔습니다. 브리프 파일을 안 만들었거나 "FAIL"이 스쳤으면 차단됐습니다. 게이트가 검사한 건 글의 품질이 아니라 서류의 존재였습니다. 7월 29일에 걷어냈습니다.

이게 왜 키오스크와 같은 실패인지는 두 줄로 설명됩니다. 지표는 개선됐습니다. 문제는 그대로였습니다. 키오스크는 인건비 항목을 줄이고 대기 시간과 이탈을 남겼습니다. 제 게이트는 통과율 100%를 만들고 문체 문제를 그대로 남겼습니다. 양쪽 다 측정 대상을 실제 문제 대신 측정 가능한 대리물로 바꿔치기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넘어진 게 처음도 아닙니다. 시크릿 스캔을 걸어뒀는데 AWS 키가 그냥 통과한 일이 있었고, 커밋 훅이 정작 커밋되는 파일을 안 보고 있던 일도 있었습니다. 셋 다 같은 모양입니다. 검사가 돌고 있었고, 초록불이 켜져 있었고, 검사 대상이 실제 위험과 달랐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판별식을 하나 두고 씁니다. 코드로 강제할 수 있는 건 모델이나 사람의 주장과 무관하게 성립하는 사실뿐입니다. 파일에 AWS 키 패턴이 들어 있냐는 질문은 여기 해당합니다. 모델이 뭐라고 주장해도 답이 안 바뀝니다. 이 글이 AI 냄새가 나냐는 질문은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건 판단이고, 판단을 게이트로 만들면 판단하는 쪽이 통행증을 발급하게 됩니다.

키오스크에 태워도 되는 업무를 고르는 기준도 같은 모양입니다. 들어올 수 있는 입력을 미리 다 적어둘 수 있는가. 사용자가 한 단계 뒤로 돌아갈 수 있는가. 실패했을 때 그게 기록에 남는가. 셋 중 하나라도 아니라면 사람에게 가는 길을 같이 설계해야 합니다.

AI 에이전트를 붙일 때도 저는 이제 이 순서로 봅니다. 무엇을 자동으로 처리할지보다 넘기는 조건을 먼저 적습니다. 모델이 확신하지 못할 때, 요청이 정의된 범위를 벗어날 때, 되돌릴 수 없는 동작을 하려 할 때 어디로 넘길지를 코드에 박아둡니다. 넘기는 경로가 없는 에이전트는 잘 만든 에이전트가 아니라 화면이 예쁜 키오스큽니다.

그리고 이 경로는 지표에서 벌점으로 취급되면 안 됩니다. 자동화율을 목표로 잡는 순간 사람에게 넘기는 걸 줄이는 게 담당자에게 이익이 됩니다. 그때부터 시스템은 사용자를 돕는 방향이 아니라 숫자를 지키는 방향으로 진화합니다. ARS의 상담원 연결 번호가 매번 바뀌는 이유를 저는 여기서 찾습니다. 누가 악의로 그렇게 만든 게 아니라, 그렇게 만드는 사람이 칭찬받는 지표가 걸려 있었을 겁니다.

자동응답을 AI라고 부르면 실패 모드가 이동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건 대부분 결정론적인 시스템입니다. 메뉴 트리와 상태 기계. 그럼 이걸 LLM으로 바꾸면 해결되나.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 실패 모드가 이동합니다. 그리고 새 실패 모드가 더 비쌉니다.

결정론적 시스템은 못 하는 걸 못 한다고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메뉴에 없으면 없는 겁니다. 짜증나지만 사용자는 자기가 막혔다는 걸 압니다. LLM은 못 하는 걸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사용자는 자기가 틀린 답을 받았다는 걸 모르고 돌아갑니다.

에어캐나다 사례가 이걸 법정에서 확정했습니다. 2024년 2월 브리티시컬럼비아 민사분쟁해결심판소는 Moffatt v. Air Canada에서 항공사에 배상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조모상을 당한 승객이 웹사이트 챗봇에 물었더니 사후 90일 안에 신청하면 유가족 할인을 소급 적용받을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실제 규정은 탑승 전 신청이었습니다. 심판소는 부실표시를 인정하고 812.02 캐나다달러를 물렸습니다.

금액은 작습니다. 판시 내용이 큽니다. 에어캐나다는 챗봇이 별도의 법적 주체라서 자기 답변에 책임진다는 취지로 항변했고, 기각됐습니다. 웹사이트에 있는 정보는 정적 페이지든 챗봇 출력이든 회사 책임이라는 겁니다. 확률적으로 문장을 생성하는 시스템의 출력에 계약상 책임이 붙습니다.

민원 처리가 특히 위험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오류 비용이 비대칭입니다. 쇼핑몰 챗봇이 틀리면 환불하면 됩니다. 행정이나 법률 안내가 틀리면 사람이 기한을 놓칩니다.

알래스카 법원 시스템의 사례가 좋은 참고입니다. 상속과 유언검인 절차를 안내하는 생성형 AI 챗봇 AVA를 만들었는데, NBC News 보도에 따르면 3개월 프로젝트로 시작한 게 1년 3개월을 넘겼습니다. 환각 때문입니다. AVA는 존재하지 않는 알래스카 로스쿨에 도움을 구하라고 안내한 적이 있습니다. 대응으로 응답 근거를 법원 공식 문서로 제한하고 웹 검색을 뺐습니다. 초기 버전은 과하게 공감적이어서 상을 당한 이용자들이 짜증을 냈고, 불필요한 조의 표현을 지웠습니다.

법원 행정처장 Stacey Marz의 말이 이 프로젝트 전체를 요약합니다. 이런 일은 100% 정확해야 하는데 이 기술로는 그게 정말 어렵다는 겁니다.

저는 이 사례를 실패로 안 읽습니다. 3개월짜리를 1년 3개월 동안 붙잡고 정확도 요구를 안 낮춘 게 오히려 드문 일입니다. 대부분의 기관은 반대로 합니다. 일정을 지키고 정확도를 낮춥니다. 그리고 그게 쓰는 사람 입장에서 AI 시늉만 하는 자동응답으로 느껴지는 물건이 됩니다. 진짜 문제는 모델의 성능이 아니라, 성능이 부족한 걸 알면서 배포를 승인한 결정입니다.

다른 직함으로 재고용합니다

시장은 이미 되돌리고 있습니다.

클라르나가 2024년 2월에 발표한 숫자는 화려했습니다. AI 어시스턴트가 상담원 700명 분량의 일을 하고, 한 달에 230만 건의 대화를 처리하고, 해결 시간을 11분에서 2분 미만으로 줄였고, 연 4천만 달러를 절감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습니다. 저도 그때 이 발표를 읽었고 인상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25년 5월 CEO Sebastian Siemiatkowski는 블룸버그에 비용 절감을 너무 밀어붙였다고 인정했습니다. 서비스 품질이 떨어졌고, 복잡한 케이스와 프리미엄 응대에 사람을 다시 뽑기 시작했습니다. AI는 대량으로 들어오는 1차 응대에 남겼습니다.

11분에서 2분으로 줄어든 그 시간이 어디로 갔는지 이제 짐작이 갑니다. 잔차로 갔습니다. 2분 안에 끝난 건 원래 쉬운 요청이었고, 어려운 요청은 처리된 게 아니라 대기열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가트너가 2026년 2월에 내놓은 예측이 이 패턴을 일반화합니다. 2025년 10월에 고객서비스 리더 321명을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2027년까지 인원 감축을 AI 때문이라고 밝힌 기업의 절반이 비슷한 일을 하는 인력을 다른 직함으로 재고용할 것이라고 봤습니다. 같은 조사에서 실제로 AI 때문에 상담 인력을 줄인 리더는 20%뿐이었습니다.

"다른 직함으로"라는 조건이 이 예측의 진짜 내용입니다. 사람이 돌아오는데 장부의 이름이 바뀝니다. 상담원이 아니라 고객경험 스페셜리스트가 되고, 인건비가 아니라 AI 운영 비용으로 잡힙니다. 서울시 디지털 안내사와 같은 구조입니다. 일은 그 자리에 있고 항목만 옮겨갑니다.

가트너의 Emily Potosky는 AI가 사람 상담원이 제공하는 전문성과 공감, 판단을 완전히 대체할 만큼 성숙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진단에 반만 동의합니다. 성숙도만의 문제였다면 모델이 좋아지면 저절로 풀립니다. 그런데 ARS의 번호가 매번 바뀌는 건 모델 성숙도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접근성 준수율 4%도, 예산을 3년 연속 깎은 것도 그렇습니다. 모델이 아무리 좋아져도 저 숫자는 안 움직입니다.

파일럿이 실패하는 자리도 대개 모델이 아니었습니다. AX 도입 파일럿의 95%가 깨지는 자리는 구두로 끝난 회의였다고 전에 썼는데, 여기도 같습니다. 기술이 부족해서 실패하는 경우보다 무엇을 자동화하지 않을지를 정하지 않고 시작해서 실패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날 저녁 ARS를 붙잡고 있으면서 든 생각은 화가 아니라 익숙함이었습니다. 저도 이걸 만들어본 사람이라섭니다. 제 발행 스크립트의 게이트는 두 달 반 동안 아무것도 검증하지 않으면서 초록불을 켜고 있었고, 저는 그 초록불을 보고 안심했습니다.

자동화를 설계할 때 먼저 정해야 하는 건 무엇을 처리할지가 아니었습니다. 처리하지 못하는 걸 어디로 보낼지였습니다. 그 경로를 정하지 않으면 잔차는 사라지지 않고 아무 데나 고입니다. 남은 직원의 주당 2시간이 되거나, 세금으로 고용한 안내사 815명이 되거나, 160분짜리 대기열이 되거나, 통과율 100%짜리 가짜 게이트가 됩니다.

키오스크는 인건비를 줄이려고 들어왔습니다. 절감된 건 인건비 항목이었고, 인건비는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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