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HH는 날짜를 짚었고 저는 AI에 손코딩을 넘긴 날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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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H가 올해 Rails World에서 한 발표를 요약한 영상을 몇 편 봤습니다. 원본 발표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건 아니고, 한국어로 정리해 준 유튜브 영상 네 편을 이어서 봤습니다. 발표를 남이 정리해 준 걸로 보고 대충 알았다고 넘어가는 것도, 생각해 보면 요즘 제가 코드를 대하는 방식이랑 비슷합니다. 원본을 다 읽지 않고 정리된 결과를 보고, 이상한 데가 있으면 그때 찾아봅니다. 내용이 많았는데 제일 오래 남은 건 날짜 하나였습니다. 2025년 11월 24일. 영상에 따르면 DHH는 이날을 "우리 시대의 코닥 브라우니"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Claude Opus 4.5가 나온 날입니다. 1900년에 1달러짜리 카메라가 나오면서 초상화를 그리던 화가들이 일감을 잃고 방향을 틀었던 것처럼, 그날부터 프로그래머의 일이 바뀌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리고 기술은 비탈길처럼 매끄럽게 오르는 게 아니라 한참 평평하다가 어느 날 한 칸 뛰는 계단처럼 온다고 했습니다. 영상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제 날짜를 찾고 있었습니다. 저는 언제였지. 생각이 안 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직접 친 코드 어림잡을 수 있는 건 있습니다. 2025년 9월쯤부터는 제가 코드를 직접 쓴 기억이 없습니다. DHH가 짚은 날보다 두 달쯤 앞입니다. 이걸 날짜라고 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9월 몇 일에 무슨 일이 있어서 그날부터 안 쓴 게 아니라, 거꾸로 짚어 올라가다 보니 그쯤부터는 기억이 비어 있다는 정도입니다. 어느 날 키보드에서 손을 뗀 게 아니라 손으로 친 마지막 줄이 언제였는지 생각해 보니 안 떠오르는 겁니다. 두 달 앞이라고 해서 제가 남들보다 빨랐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때 무슨 모델을 쓰고 있었는지도 정확히 기억이 안 납니다. DHH는 특정 모델이 나온 날을 짚었는데 저는 어떤 모델 때문에 넘어왔는지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모델이 바뀐 날은 발표가 있으니 찾아보면 나오겠지만, 제가 바뀐 날은 아무 데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커밋 기록을 뒤져 보면 뭔가 나올...

피그마 주가가 하루에 8.7% 빠진 날

밝은 사무실 책상에 놓인 성곽 모형 주변의 해자가 말라 바닥이 드러난 장면

4월 17일 금요일에 세 가지 일이 거의 한꺼번에 있었습니다.

뉴욕 장이 열리자마자 피그마 주가가 빠지기 시작해서 그날 8.7% 내린 채로 끝났습니다. Adobe, Wix, GoDaddy도 같이 빠졌습니다. 같은 날 오전에 Anthropic은 Claude Design을 내놨습니다. 자연어 한 줄로 시각 디자인을 뽑고, 조직의 디자인 시스템을 넣어두면 그 문법대로 만들고, Claude Code로 구현까지 넘겨주는 리서치 프리뷰였습니다. 그리고 서울 시간으로 그날 저녁 무렵, 제가 있는 팀의 디자인 파트가 회의실에 모였습니다. "Claude Design 한 주 보고 방향 정합시다." 그러고 디자인 시스템 작업이 멈췄습니다.

이 셋이 한 줄로 이어져 보였습니다. 제품 공지 하나가 아직 만져보지도 않은 사람들 지갑을 먼저 흔들었고, 만져본 사람들 작업은 세웠습니다. 주가가 제일 먼저 반응했다는 게 저는 좀 오래 남았습니다. 써본 사람보다 안 써본 사람이 먼저 판단을 내린 셈이니까요.

보통은 반대 순서를 생각합니다. 새 도구가 나오면 누가 써보고, 좋다는 말이 돌고, 사람들이 하나둘 옮겨 타고, 몇 분기 뒤에 숫자에 찍히고, 그걸 보고 주가가 반응합니다. 이번엔 맨 끝에 있어야 할 게 맨 앞에 왔습니다. 써본 사람이 아직 거의 없는데 값이 먼저 빠졌고, 그다음에 팀들이 써보기 시작했습니다. 주가가 사용자 행동을 앞서 간다면 그 뒤를 사용자들이 두세 분기쯤 늦게 따라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나온 것

Claude Design은 한 번에 여러 걸 깔고 나왔습니다. "채용 공고 랜딩 페이지 하나"라고 쓰면 화면이 나옵니다. 조직의 토큰, 컴포넌트, 가이드라인을 한 번 넣어두면 다음부터는 그 문법으로 나옵니다. GitHub 레포를 붙이면 기존 코드를 보고 디자인을 만들고, 만든 걸 Claude Code로 넘기면 그게 곧 구현 지시서가 됩니다. 결과물은 PDF, PPTX, HTML로 바로 뽑을 수 있고 Canva로도 보낼 수 있습니다.

정식 출시도 아니고 리서치 프리뷰였습니다. 그런데 시장은 한 주도 안 기다렸습니다. 기사들은 처음부터 "피그마에 대한 도전"이라는 말을 제목에 걸었고, 테크 섹터는 사상 최고치인데 피그마만 빠진다는 식으로 대비를 짚은 데도 있었습니다.

제가 눈여겨본 건 빠진 회사가 넷이었다는 겁니다. 디자인 도구, 광고와 브랜드 제작, 웹사이트 빌더, 도메인과 호스팅. 하는 일이 다 다른데 같은 날 같은 쪽으로 빠졌습니다. 공통점을 찾자면 "시각물을 만든다"라기보다 "프롬프트로 대신 만들 수 있는 결과물을 판다" 쪽인 것 같습니다.

AI 뉴스가 나오면 관련주가 빠지는 건 흔한 일이라 그냥 넘길 수도 있었는데, 이번엔 좀 달라 보였습니다. 시장이 이 회사들을 한꺼번에 같은 질문 앞에 세운 것 같았습니다. 이 회사의 해자를 AI가 얼마나 빨리, 얼마나 깊이 지나가느냐. 그 답이 넷 다 좋지 않게 나왔고 넷 다 하루 만에 값이 다시 매겨졌습니다.

그리고 한 주가 지나서 보니 Adobe는 다시 올랐고 피그마는 못 올랐습니다. 같은 날 같은 일을 겪었는데 그다음이 달랐습니다.

동반 하락이라는 말이 좀 안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같이 떨어졌다기보다 같은 잣대로 한꺼번에 다시 재어졌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 잣대가 앞으로 계속 쓰일 거라면, 이번에 빠진 네 회사만의 일이 아니라 비슷한 걸 파는 회사들은 다 언젠가 그 잣대 앞에 서게 될 겁니다.

해자라는 말

해자라는 말은 버핏이 1999년에 쓴 글에서 굳어졌습니다. 넓고 오래가는 해자를 두른 사업이 투자자에게 보답한다는 얘기였고, 이후 20년 넘게 회사를 보는 틀의 뼈대가 됐습니다. 그걸 더 잘게 나눈 책도 나왔고요.

SaaS로 좁히면 보통 네 가지를 듭니다. 네트워크 효과, 전환 비용, 데이터, 에코시스템. 피그마는 넷 다 갖춘 교과서 같은 회사였습니다. 그런데 4월 17일 이후로 보면 넷 다 금이 간 것처럼 보입니다.

다 같이 피그마를 쓰니까 나도 피그마를 쓴다. 10년 동안 그 합의가 쌓였습니다. 혼자 쓰면 별 의미 없고 조직이 다 같이 써야 가치가 커지는, 디자이너와 개발자와 PM이 파일 링크 하나로 모이는 방식이었습니다. Claude Design의 디자인 시스템 주입은 이걸 조용히 비켜 갑니다. 문법은 여전히 조직이 공유하는데, 실제로 만드는 건 각자 혼자 합니다. 같이 열어서 같이 고치던 게, 각자 뽑아서 나중에 모아 보는 식으로 쪼개집니다. 공동 편집이 없어지는 건 아닌데 거기에 매겨지던 값이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디자인 시스템을 다른 도구로 가져가는 건 원래 반년짜리 일이었습니다. 컴포넌트 라이브러리를 옮기고, 토큰을 다시 맞추고, 버전 관리를 새로 깔고, 플러그인을 다시 세팅하고. 전환 비용이 높다는 건 더 좋은 게 나와도 못 바꾼다는 뜻이었습니다. Claude Design에서는 그게 업로드 한 번과 프롬프트 몇 번으로 줄어듭니다. 시스템이 어디 저장돼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인지만 적혀 있으면 어느 도구든 그 문법으로 뽑습니다. 데이터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 설명을 건네는 일이 되는 거죠. 저는 이게 제일 크다고 봤습니다.

전환 비용은 원래 쓰는 사람이 갇혀 있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갇혀 있으니까 회사는 값을 조금 올려도 사람들이 떠나지 않을 거라고 계산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계산이 SaaS 몸값의 큰 부분을 받쳐왔는데, 나가는 문이 넓어지면 그 계산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떠나느냐와 상관없이, 떠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값을 올리기가 어려워집니다.

.fig 파일은 피그마만 열 수 있었습니다. 파일 형식 자체가 해자였는데, Claude Design은 HTML이나 PPTX, PDF를 바로 뽑으니까 중간 형식을 아예 건너뜁니다. 피그마로 만들어서 다른 데로 내보내던 두 단계가, 만들면서 필요한 형식을 고르는 한 단계로 줄어듭니다. 문지기가 있던 데에 출력 버튼만 남는 느낌입니다. 파일을 주고받던 사람들이 이제 결과물을 주고받습니다. 결과물에는 피그마가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중간 형식이 사라지는 게 마냥 편하기만 할지는 좀 걸립니다. .fig 파일이 피그마의 해자였던 건 맞는데, 그 파일이 있었던 데에는 이유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들 같은 파일을 열어 보니까 누가 언제 뭘 바꿨는지가 한 군데에 남았고, 의견도 그 파일 위에 달렸습니다. 결과물만 주고받게 되면 그 결과물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왔는지는 각자의 대화창 안에만 남습니다. 그걸 아쉬워할 사람이 생각보다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아쉬움이 지금 피그마 몸값을 받쳐줄 만큼 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플러그인 생태계도 그렇습니다. 피그마 플러그인은 피그마 안의 기능을 넓힙니다. Claude Design은 레포의 코드를 읽고, 그 코드의 문법으로 디자인을 만들고, 만든 걸 다시 코드로 밀어 넣습니다. 맞물리는 깊이가 다릅니다. 호환되는 게 아니라 왕복합니다.

넷을 하나씩 보면 같은 게 보입니다. 해자가 전부 파일이나 조직이 같이 쓰는 상태를 전제로 했는데, AI는 그보다 앞에 있는 "의도"에서 결과물을 뽑습니다. 파일이 생기기 전에, 조직이 합의하기 전에 한 줄 의도가 결과물이 됩니다. 해자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 해자를 건너야 할 이유가 줄었을 뿐입니다.

성을 공격하는 쪽이 해자를 메우는 게 아니라, 성 안에 있던 게 성 밖에서도 나오게 된 상황 같습니다. 해자가 아무리 넓어도 성 안까지 들어갈 필요가 없으면 해자는 그냥 물웅덩이입니다. 피그마가 10년 동안 판 해자는 여전히 깊은데, 사람들이 원하던 건 성 자체가 아니라 성에서 나오던 결과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물이 다른 데서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해자를 지키는 데 들인 돈이 갑자기 좀 다르게 보입니다. 공동 편집을 더 매끄럽게 만들고, 플러그인 생태계를 키우고, 파일 형식을 더 풍부하게 만드는 데 들인 노력은 전부 성을 더 튼튼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노력이 헛된 건 아닌데, 사람들이 성 밖에서 볼일을 볼 수 있게 되면 성이 튼튼한 건 덜 중요해집니다. 피그마가 잘못한 게 있어서가 아니라 잘해온 방향이 그대로 약점이 되는 경우인 것 같습니다.

누가 피그마를 쓰고 있었나

Martin Alderson이라는 분석가가 피그마 사용자를 나눠본 글이 있습니다. 디자이너가 33%, 개발자가 30%, 그 밖의 사람들이 37%라고 합니다. PM, 마케터, 기획자 같은 사람들이요.

이걸 Claude Design이 노리는 사람들과 겹쳐보면 그림이 좀 무섭습니다.

디자이너가 아닌 37%는 빠르게 그림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슬라이드든 랜딩 페이지든 목업이든 자연어로 뽑고 싶은 사람들이고, Claude Design이 정확히 이 사람들을 봅니다. 이 사람들한테 피그마는 사실 과한 도구였습니다. 필요한 건 빠르고 적당히 쓸 만한 그림이었는데 프로 디자인 도구를 이고 있었던 거죠.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한테 피그마는 열기 전부터 좀 부담스러운 도구였을 것 같습니다. 그냥 말로 하면 되는 쪽이 생기면 굳이 열 이유가 없습니다.

개발자 30%는 Claude Code 쓰는 사람들과 겹칩니다. 디자이너가 만든 화면을 구현하려고 피그마를 열던 사람들인데, 디자인이 Claude Code로 바로 넘어오면 피그마를 열 이유가 없어집니다. 이건 이미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Jane Street 엔지니어가 요즘은 피그마보다 Claude Code로 디자인을 더 한다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지난 몇 달 사이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개발자 입장에서는 이게 꽤 자연스러운 흐름 같습니다. 개발자한테 피그마는 원래 자기가 만드는 도구가 아니라 남이 만든 걸 보러 가는 곳이었습니다. 보러 가는 곳은 안 가도 되면 금방 안 가게 됩니다. 디자인이 처음부터 코드 옆에서 나오면 피그마 탭을 열어둘 이유가 없고, 그런 사람이 팀에 몇 명만 생겨도 피그마 시트 몇 개는 쓰는 사람 없이 돈만 나가는 시트가 됩니다.

남는 건 디자이너 33%입니다. 피그마가 제일 강한 층이고, 컴포넌트 시스템 설계나 인터랙션 설계, 디자인 크리틱, 리뷰 같은 일을 합니다. Claude Design은 아직 여기까지 못 들어왔습니다. 디자인 시스템을 설계하는 일은 화면 한 장을 뽑는 일과 좀 다릅니다. 컴포넌트를 어떤 단위로 쪼갤지, 예외를 어디까지 허용할지, 팀이 커졌을 때 무엇이 먼저 무너질지를 미리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판단은 결과물만 봐서는 잘 안 보이고, 그래서 프롬프트 한 줄로 대신하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피그마 몸값은 디자이너만 쓰는 도구로 매겨진 적이 없습니다. 나머지 67%까지 다 쓰는 "모두의 디자인 도구"로 매겨졌습니다. 그 67%가 흔들리면 몸값이 흔들립니다. 성장도 대부분 그쪽에서 나왔을 겁니다. 디자이너는 이미 다 피그마를 쓰고 있으니 더 늘어날 데가 별로 없고, 새로 늘어나는 사용자는 대개 디자이너 옆에서 파일을 같이 보던 사람들이었을 테니까요. 제품이 좋냐 나쁘냐의 문제가 아니라 주가 계산의 문제가 됩니다. 디자이너들이 계속 피그마를 아끼고 잘 쓰더라도, 그 사람들만으로는 지금 몸값이 설명이 안 됩니다. 그리고 피그마는 그 67%를 지킬 자기 AI 카드가 별로 없어 보입니다.

피그마 AI는 경쟁자한테 돈을 냅니다

여기가 제일 이상했습니다. 피그마에는 이미 Figma Make라는 AI 제품이 있습니다. 같은 분석에 따르면 이 제품은 안에서 Anthropic과 Google 모델을 부릅니다. 피그마가 AI 기능을 많이 팔수록 그 돈이 흘러가는 곳이 지금 피그마 주가를 떨어뜨린 바로 그 회사입니다.

비유가 아니라 회계 얘기입니다. AI를 얹은 SaaS는 모델 호출 비용에 마진이 그대로 끌려갑니다. Figma Make가 인기가 많을수록 Anthropic과 Google 매출이 늘고 피그마 마진은 눌립니다. 그런데 그 Anthropic이 피그마 핵심 영역에 직접 제품을 던졌습니다. 잘 팔리면 경쟁자를 키우고, 안 팔리면 AI 카드가 없는 회사가 됩니다. 어느 쪽이든 피그마한테 좋은 그림이 아닙니다.

이 구조가 피그마만의 문제는 아닐 것 같습니다. 요즘 나오는 SaaS 제품의 AI 기능은 대부분 안에서 몇 안 되는 모델 회사 API를 부릅니다. 그 모델 회사들이 지금까지는 부품을 파는 쪽이었는데, Claude Design처럼 완성품을 직접 내놓기 시작하면 부품을 사던 회사들은 자기 공급자와 경쟁하게 됩니다. 공급자가 원가도 정하고 경쟁 제품도 내는 상황이라 협상할 여지가 많지 않습니다.

자체 모델을 만들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 나올 수 있는데, 조직 크기를 보면 쉽지 않아 보입니다. 피그마와 Anthropic의 인원이 비슷한데 오히려 Anthropic 쪽이 조금 더 많습니다. 자기보다 사람이 많은 AI 회사를, 회사 안에 AI 랩 하나 차려서 따라가는 그림은 잘 안 그려집니다. 게다가 Anthropic은 한 분야에 몰려 있는 조직이고 피그마는 디자인 도구 전체를 굴려야 하는 조직입니다. 머릿수로 비교하는 것보다 차이가 더 클 것 같습니다. 모델 하나를 따라잡으려면 사람만이 아니라 컴퓨팅과 데이터와 몇 년의 시간이 같이 필요한데, 피그마가 그걸 들이는 동안 Anthropic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피그마 주가는 상장 직후 고점에서 10분의 1 남짓까지 내려와 있습니다. 재밌는 건 바닥을 찍은 게 Claude Design이 나오기 사흘 전이었다는 겁니다. 시장은 소문이 돌 때부터 값을 다시 매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Claude Design은 취미나 비전문가 쪽으로 쏠릴 거고 피그마는 프로 디자이너 중심으로 다시 정리될 수 있다는 분석도 있었고, 목표주가를 보면 회복을 점치는 쪽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 회복을 경쟁자한테 추론 비용을 내는 구조 안에서 해야 한다는 게 이 회사가 안고 있는 숙제 같습니다.

한 주 뒤

Adobe는 그다음 날부터 대규모 자사주 매입을 발표했고, 이어서 연 Adobe Summit에서 AI 브랜드 도구와 검색 최적화 기능을 내놨습니다. 주가가 꽤 올라서 4월 17일 직후 며칠 빠진 걸 상당 부분 메웠습니다. 올해 전체로 보면 여전히 많이 빠져 있긴 합니다. 피그마는 한 주 내내 비슷한 값에 머물렀습니다. 자사주 매입도 없고, AI 카드는 경쟁자 API를 부르는 구조라 믿음을 되찾기가 어렵습니다.

같은 일을 당하고 결과가 다른 걸 보면, 시장이 보는 건 AI 영향을 받느냐 안 받느냐가 아닌 것 같습니다. AI 앞에서 자기 카드를 꺼낼 수 있느냐 없느냐인 것 같습니다. Adobe가 꺼낸 카드가 정말 AI에 맞설 만한 건지는 저도 판단이 안 섭니다. 그래도 뭔가를 바로 꺼냈다는 것, 그리고 그게 자기 돈과 자기 기술이었다는 게 시장한테는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피그마는 꺼낼 게 있어도 그게 남의 모델 위에 서 있습니다.

조금 넓혀 보면 모델에 기대는 SaaS와 모델을 가진 AI 회사가 따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Figma Make는 앞쪽이고 Anthropic은 뒤쪽입니다. 그 사이에 하나가 더 있는데, 모델은 남의 걸 쓰지만 도메인을 깊이 파서 자기 영역을 지키는 회사들입니다. YC CEO가 60일에 60만 줄을 혼자 짰다는 가스택 사례가 그 끝이 어디까지 가는지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AI 네이티브 스타트업은 수십 명으로 예전 같으면 수백 명이 하던 회사를 대신할 수 있고, 그게 새 경쟁 상대가 됩니다.

며칠 전에 npx 한 줄로 회사 하나를 세우고 에이전트들에게 조직도와 예산을 붙여 굴리는 오픈소스 런타임을 뜯어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 본 것도 이 범주가 어디까지 내려가느냐였습니다. 조직 크기가 해자였던 시절의 계산이 그 층에서는 아예 성립하지 않습니다.

Anthropic이 발표에 넣은 Brilliant 사례도 같은 얘기입니다. 다른 도구로는 프롬프트를 스무 번 넘게 넣어야 나오던 결과가 Claude Design에서는 두 번이면 나왔다고 합니다. 저는 그 숫자보다 방향이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생산성이 열 배 나는 구간이 생기면 그걸 먼저 잡는 쪽 몸값이 빠르게 오르고, 반대편은 같은 속도로 떨어집니다. 프롬프트를 스무 번 넣는 동안에는 사람이 중간중간 생각을 고칠 틈이 있었는데, 두 번이면 그 틈도 같이 줄어듭니다. 빨라진 게 좋은 건 맞는데 그 틈에서 나오던 것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투자자들이 묻기 시작한 건 세 가지 정도인 것 같습니다. 이 회사 매출에서 프롬프트로 대신할 수 있는 사용자가 얼마나 되나. 자기 모델을 갖고 있거나 가질 수 있나. AI 앞에서 자기 카드를 꺼낼 만한 크기와 속도가 되나. 피그마는 순서대로 많다, 어렵다, 어렵다로 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주가는 그 답을 먼저 알고 있었던 것 같고요.

첫 번째 질문이 제일 아파 보입니다. 나머지 둘은 회사가 돈과 시간을 들이면 어떻게든 바꿀 수 있는데, 매출 구성은 회사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습니다. 비디자이너 사용자를 붙잡으려고 피그마를 더 쉽게 만들면 Claude Design과 정면으로 붙게 되고, 프로 디자이너 쪽으로 좁히면 지금 몸값을 설명할 사용자 수가 안 나옵니다. 어느 쪽으로 가도 지금 숫자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 주에 팀에서 본 것

여기서부터는 제가 본 얘기입니다. 저는 2018년부터 2021년까지 카카오에서 데스크탑 클라이언트를 만들었고, 지금 있는 팀이나 프로젝트는 밝히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만 4월 17일 오후에 그 팀에서 본 장면은 적어두고 싶었습니다.

그날 오후에 평소처럼 코드 리뷰를 보고 있었는데, 디자인 파트 한 분이 들어와서 회의실에 잠깐 오라고 했습니다. 팀장이 노트북 화면을 띄웠고, Claude Design 출시 블로그였습니다. 10분쯤 같이 훑고 나서 결정이 났습니다. "이번 주 디자인 시스템 작업은 잠깐 멈춥시다. 한 주 동안 Claude Design 써보고 방향 정하죠." 그때 디자인 파트가 하던 건 디자인 시스템 v2였습니다. 피그마 컴포넌트 라이브러리 정리, 토큰 이름 바꾸기, 플러그인 워크플로우 정비. 길게 잡으면 두 달짜리였습니다.

디자이너들이 겁을 먹어서 내린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Claude Design이 우리 시스템을 받아서 어느 정도 품질로 뽑는지를 먼저 봐야 v2를 어떤 구조로 짤지 정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어떤 도구를 쓸지가 아니라, 이 디자인 시스템을 누가 쓰게 될지를 다시 보는 거였습니다. 저한테는 이게 제일 선명했습니다. 디자인 시스템을 쓰는 게 사람만이 아니라 모델이기도 하다면, 토큰 이름 하나를 정하는 기준부터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토큰 이름을 사람이 읽기 좋게 짓는 것과 모델이 잘못 읽지 않게 짓는 게 같을지 다를지는 저도 모릅니다. 만약 다르다면 디자인 시스템 문서가 두 벌이 되는 날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 보는 가이드와 모델에게 건네는 설명이 따로 있고, 둘이 조금씩 어긋나는 걸 누군가 계속 맞춰야 하는 식으로요. 그러면 디자이너가 하는 일에 그 맞추는 일이 하나 더 붙을 것 같습니다. 그 한 주 동안 본 게 몇 가지 있습니다.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이 디자인을 시작했습니다. 기획하는 분이 아이디어 슬라이드를 Claude Design으로 뽑아서 회의에 들고 왔습니다. 평소 같으면 디자인 파트에 요청하고 다음 주에 받았을 일이 "지금 뽑아 왔는데 봐주세요"가 됐습니다. 품질은 프로 기준엔 못 미쳤습니다. 그래도 회의 초반에 그림을 같이 보면서 얘기하기엔 충분했습니다. 그 "충분함"을 예전엔 피그마가 맡았는데, 이제 Claude Design이 나눠 가져갔습니다.

회의에서 그 슬라이드를 보면서 든 생각은, 이게 디자인 파트의 일을 줄였다기보다 디자인 파트에 가기 전 단계를 하나 만들었다는 거였습니다. 예전에는 머릿속 그림을 말로 설명하고 디자이너가 그걸 그려줘야 비로소 다 같이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말로 설명하던 단계가 그림으로 바로 넘어옵니다. 디자이너한테 오는 요청이 "이런 느낌으로 하나 만들어 주세요"에서 "이걸 제대로 다듬어 주세요"로 바뀌는 셈입니다. 그게 디자이너한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것 같습니다.

개발자도 디자인을 시작했습니다. Claude Code로 프론트엔드 작업하던 분이 "그냥 여기서 한 번 뽑아볼게요" 하더니 Claude Design으로 화면을 만들고, 그걸 Claude Code에 그대로 넣고, 구현까지 이어갔습니다. 디자인 파트 리뷰는 그다음이었습니다. 디자인하고 구현하던 순서가 프롬프트, 구현, 리뷰 순서로 바뀐 겁니다. 리뷰가 맨 뒤로 가면 디자이너가 보는 건 그림이 아니라 이미 돌아가는 화면입니다. 그림 단계에서는 쉽게 고칠 수 있던 걸, 코드가 된 다음에 고쳐 달라고 해야 합니다. 빨라진 만큼 되돌리는 값도 달라지는 것 같아서 이 순서가 계속 갈지는 좀 더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두 장면이 같은 주에 있었다는 게 저한테는 좀 컸습니다. 하나만 있었으면 한 사람이 새 도구를 신기해한 정도로 넘어갔을 것 같은데, 기획 쪽과 개발 쪽에서 따로따로 같은 일이 생기니까 이건 그냥 호기심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피그마를 계속 쓸 건가"가 처음으로 회의 안건에 올라왔습니다. 그 전엔 한 번도 안건이 된 적 없는 문장이었습니다. 결론은 아직 안 났습니다. 디자인 시스템 본진은 피그마에 둘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다만 그 본진에 들어가는 길이 여러 개가 된다는 건 다들 동의했습니다. 누구는 피그마로, 누구는 Claude Design으로, 누구는 Claude Code로 들어갑니다. 본진은 하나인데 들어가는 길이 셋입니다. 길이 셋이면 누가 어느 길로 들어왔는지에 따라 결과물 모양도 조금씩 달라질 텐데, 그걸 맞추는 일이 새로 생길 것 같습니다. 피그마가 시트 단위로 돈을 받는다는 걸 생각하면, 피그마를 거치지 않는 길이 하나 늘 때마다 피그마 시트가 하나씩 빠지는 셈입니다.

이걸 회사 전체로 곱하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본 건 한 팀의 한 주뿐입니다. 다른 팀은 아예 신경도 안 썼을 수도 있고, 저희보다 훨씬 빨리 결론을 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 한 주가 피그마만 쓰던 한 주가 아니었던 건 분명합니다. AI를 쓰는 사람이 개발자에서 디자이너와 기획자로 넓어지는 걸 가까이서 봤습니다. 이런 건 지표가 한참 뒤에 확인해 주는 것 같고, 주가는 그보다 먼저 봅니다.

디자인이 개발자에게 넘어오는 길은 오래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디자이너가 만든 파일을 열어서 보고 구현하는 길이요. 그게 너무 당연해서 길이라고 부를 생각도 잘 안 하게 됩니다. 이번 주에 본 건 그 당연한 게 셋으로 나뉘는 장면이었고, 그중 둘은 피그마를 안 거칩니다. 디자이너가 하는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닌데, 디자이너가 모든 화면의 시작점이던 순서는 확실히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리뷰하는 사람이 되는 건지, 시스템을 지키는 사람이 되는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해자는 이제 뭘까

해자 이론은 오래가는 우위가 있다는 걸 전제로 했습니다. 버핏이든 누구든 그 우위가 "오래간다"는 걸 깔고 얘기했습니다. AI는 그 "오래"의 단위를 바꾸는 것 같습니다. 예전엔 5년, 10년 가던 해자가 이제는 반년, 1년 만에 다시 값이 매겨집니다. 해자를 파는 데는 여전히 몇 년이 걸리는데 그 해자가 쓸모 있는 기간은 짧아졌다면, 해자를 파는 일 자체가 예전만큼 남는 장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안 팔 수도 없으니 회사들 입장에서는 꽤 답답할 것 같습니다. 만약 해자가 반년마다 다시 값이 매겨지는 게 정말 기본이 된다면, 회사가 잘해야 하는 건 깊게 파는 일이 아니라 자주 다시 파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게 어떤 조직에서 가능한지는 저도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공동 편집의 네트워크 효과는 약해졌고, 파일 형식이라는 문지기는 없어졌고, 전환 비용은 프롬프트 몇 번으로 줄었습니다. 이 셋은 4월 17일 이후로는 해자였던 것 쪽에 넣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남는 건 다른 데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도메인 깊이입니다. 디자이너 33%가 지키는 프로 영역, 크리틱과 리뷰와 시스템 설계를 해본 경험 같은 건 AI가 아직 못 들어왔습니다. 또 하나는 자기 모델을 가진 조직의 힘입니다. Adobe가 자사주 매입과 자체 AI 카드로 다시 오른 게 우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마지막은 조직 크기에 비해 얼마나 빠르냐입니다. 좁은 데 몰려서 빽빽하게 가는 팀이 갖는 힘이요.

한국 SaaS나 스타트업도 같은 질문 앞에 있을 것 같습니다. 네이버나 카카오 계열 SaaS도, B2B 스타트업도, 국내 디자인 도구 스타트업도요. 해자가 공동 편집이나 파일 형식이나 전환 비용에 있다면 다시 값이 매겨질 거고, 도메인 깊이나 자체 모델이나 조직 속도에 있다면 아직 시간이 좀 있을 것 같습니다. 전에 딸깍으로 만든 제품은 딸깍으로 복사된다는 얘기를 쓴 적이 있는데, 그때보다 지금 그 말이 더 맞아 보입니다.

국내 회사들이 조금 더 곤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해외 SaaS를 한국 사정에 맞게 다시 만든 제품이 꽤 많은데, 그 제품들의 해자는 대체로 한국어 지원이나 국내 결제, 국내 고객사와의 관계였습니다. 모델이 한국어를 충분히 잘하게 되면 한국어 지원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습니다. 남는 건 고객사 관계와 그 업계를 얼마나 깊이 아느냐인데, 그게 결국 도메인 깊이 얘기라 위에서 적은 것과 같은 데로 돌아옵니다.

해자가 없어진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해자가 있는 데가 바뀐 것 같습니다. 그날 피그마 주가는 그걸 사람들보다 먼저 본 것 같고, 저희 팀은 그 주에 회의실에서 봤습니다. 본진을 어디에 둘지는 저희 팀도 아직 못 정했습니다.


이 글은 SaaS 산업과 AI 제품 동향을 투자자 프레임으로 해석한 개인 분석이며, 특정 종목의 매매를 권유하거나 투자 조언으로 제공되는 글이 아닙니다. 언급된 모든 주가·수치는 기사 시점 기준이고, 투자 의사결정은 본인 책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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